경제나 재정정책에 있어서 케인즈의 큰 정부론과 프리드먼의 작은 정부론은 좌파정책과 우파정책이라는 표면화된 이념대립으로 나타나게 되고, 급기야는 우적논리(友敵論理)로까지 비약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뭐 한국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것은 내내 섭섭하다.
케인즈의 큰 정부 경제정책론의 문제점을 먼저 보여준 나라는 최초로 '임상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영국이었다. 영국병은 심각하여 복지정책으로 인한 근로의욕상실문제는 두고 두고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는 쪽의 실증의 예가 되어 왔는데, 한국에서 성장하면서 한국민들의 인식이 변화하는 모습을 함께 느끼면서 살아온 나는 어느 정도의 변화를 눈치채게 되었다.
항상 평범한 선거권자이면서 경제의 먹이사슬계층(이렇게 표현하면 가혹한 면이 있지만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부분이라는 표현이다.)의 최하층을 수평이동하는 나 자신에게는 피부로 느끼는 감각이 누구보다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시스템이라는게 제대로 갖추어지지도 않아서 가난과 문맹이 만연하던 시절부터 국민들이 생각하는 삶의 이상적인 형태는 어땠을까. 티브이에 나오는 서양식 이층집에서 자가용을 타고서 출근하고, 재벌과의 결혼, 복잡한 사생활등을 세뇌받고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꿈을 이루어줄 '돈'이 일을 하지 않고서 얻어낼 수 있다면 근로의욕이라는게 생길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부모세대 모든 분들의 소망 중 하나가 '일 안하고 편하게 살아봤으면'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었다, 근로의 현장에서 일하는 방법 외에는 어떤 지식이나 술책도 가지지 않은 천진한 동료들이 임금을 떼어먹히고 대형굴뚝에 올라가서 자살시도를 하면서 저녁뉴스의 스타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집에 석달째 월급을 가져다주지 못하니 징기스칸의 후손인 젊고 강한 이국의 처자가 아이를 데리고 몰래 도망간 일을 보며, 이건 좌파와 우파의 일도 아니고, 그냥 근로의욕을 꺾는 막막한 사건들이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도 있다.
어떤 지인은 10년을 법공부를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가지고 있는 법률지식을 이용하여 어둠의 세계를 방황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는데,정작 근로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변해갔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모든 분야가 합심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근로의욕을 북돋울려고 노력을 하는 결과가 여기저기서 느껴지는듯 하다. 근로의 댓가가 어느 정도 보장받을 만큼 변한 사회, 단순히 생계를 넘어서 자아실현까지 생각하는 높아진 교육수준, 링컨대통령의 말처럼 '노동은 모든 덕의 근원' 이라는 사실이 만연되어 있는 사회에서 복지정책이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케인즈의 경제정책이나 프리드먼의 경제정책중 어느 것이 딱히 옳다고 할 수 없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한국에서만은 노동환경이나 복지정책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이념적인 편향성으로 오해받을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퇴락한 정치나 경제 엘리트들의 일탈문제나 강성노조의 지나친 집단이기주의 같은 문제는 이념과는 다른 공리(共利)를 가르치지 않은 교육의 문제라는 측면에 무게를 두어야 하고, 국가는 근로 자체에 삶의 보람과 행복을 부여하도록 돕는다면 많은 문제들이 치유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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