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므로 생각하지 않는 생각이 가장 좋은 생각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은 노력하여 생각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념이나 종교가 권력이 되어 버려 시민들을 현혹시키는 것은 시민들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각자의 철학하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육이 그 역할을 못한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우리가 진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말해왔다. 어쩌다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진영 논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진보라는 단어를 발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사회는 발전해야 존속한다.
인공지능과 토론하는데, 인공지능은 자꾸 양자택일과 정지적인 시점을 권유한다. 나중에는 다음과 같이 인공지능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인간을 이길 수 없다. 반드시 인공지능 뒤에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의심하는 힘과 각자도생의 마음이 모두 생기겠지. 네가 잘 모르는게 있어. 인간의 마음은 복합적이야. 그리고 외적 저항은 내적이탈이 먼저 와야하는거야. 네가 잘 모르는게 있어. 인간의 마음은 연속적인거야.--
진보라는 말의 정체
의존은 어떻게 권력이 되고, 생각은 어떻게 그 고리를 끊는가
이형춘 · 독립 칼럼니스트
정책 하나를 두고 토론이 붙는다. 누군가 한마디를 던진다. "그건 진보 쪽 주장이잖아." 토론은 거기서 끝난다. 그 정책이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지, 뒤로 끌어당기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단어 하나가 판단을 대신했다.
진보(進步)는 '나아가는 걸음'이다. 보수(保守)는 '지키고 간직함'이다. 둘 다 본래 좋은 말이다. 나아가지 않는 사회는 썩고, 지키지 못하는 사회는 무너진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두 단어를 진영의 깃발로 바꿔 버렸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발전이냐 보존이냐가 아니다. 주로 북한과 미국을 대하는 태도, 곧 분단과 냉전이 만든 안보 노선이다. 이름은 남았고 뜻은 사라졌다.
이것은 단순한 말의 혼란이 아니다. 이름은 권력이다. 한 진영이 스스로를 '진보'라 부르는 순간 '발전'이라는 가치를 독점한다. 그 반대편은 정의상 발전의 적이 된다. '보수'라는 이름도 '지킴'과 '애국'을 독점한다. 양쪽이 좋은 단어를 하나씩 차지하자 시민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어졌다. 이름에 기대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진보는 진영이 아니라 발전을 뜻한다. 그리고 묻는다. 사람들은 왜 이름에 기대는가. 그 기댐은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그 고리는 어떻게 끊어지는가.
1. 미지를 찾아가는 것과 미지에 기대는 것
과학은 미지의 영역을 찾아간다. 신앙은 미지의 영역에 의지한다. 과학은 미지를 줄이면서 살고, 신앙은 미지가 남아 있어야 산다.
신앙은 흔히 '초합리성'이라는 말로 자신을 변호한다.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너머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성 너머와 이성 아래를 누가 구별하는가. 그 구분은 주장하는 사람 스스로 할 수 없다.
공정하게 말하자. 과학도 증거 이전에 몸을 던진다. 가설은 증명되기 전의 믿음이고, "미지는 결국 알 수 있다"는 전제 자체도 증명된 적이 없다. 흄이 귀납의 문제로 이미 보여준 바다. 증거 이전의 도약에서 과학과 신앙은 같은 동작을 한다. 갈라지는 것은 그 다음이다. 과학은 틀릴 준비가 되어 있다. 미지가 풀리면 환영하고 다음 미지로 간다. 미지에 기대는 신앙은 미지가 풀리면 위협을 느끼고 저항한다.
진영의 이름에 기대는 것도 같은 구조다. 정책이라는 미지를 따져 보는 대신 이름이라는 확신에 기댄다. 정치가 종교의 형식을 띠는 순간이다.
2. 종교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다
불교는 흔히 신앙이 아니라 철학이라 불린다. 반야와 공을 설하는 가르침에는 맹목적 의존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불교에도 아미타불의 힘에 기대어 극락왕생을 바라는 타력 신앙이 있다. 그리고 고려 말, 사원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던 시대가 있었다. 가르침은 같았다. 달라진 것은 권력이었다.
같은 가르침도 권력과 결합하면 종교의 병리를 드러내고, 권력에서 떨어지면 철학의 얼굴로 돌아온다. 종교의 문제는 신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이 점에서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같은 구조를 가진다. 신을 지운 공산주의가 수령 숭배라는 똑같은 권력을 다시 세운 것이 그 증거다.
3. 의존이 권력을 부른다
권력이 먼저인가, 의존이 먼저인가. 나는 의존이 권력을 불러온다고 본다.
민주주의에서 이 현상은 특히 뚜렷하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에 이르는 정당한 길은 단 하나, 국민의 지지다. 그래서 정치인은 "나에게 기대라"는 경쟁을 벌인다. 지도자는 구원자가 되고 지지자는 신도가 된다. 한국의 팬덤 정치는 어느 한 진영의 것이 아니다. 미국도 진영을 가리지 않고 같은 현상을 보여 왔다. 민주주의의 특징은 의존이 더 크다는 데 있지 않다. 의존이 권력에 이르는 유일하게 정당한 길이라는 데 있다.
경고는 오래전에 있었다. 토크빌은 민주 시민이 스스로 다스리는 수고를 포기하고 자애로운 후견 권력에 몸을 맡기는 '부드러운 전제'를 경고했다. 프롬은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시민이 자유로부터 도피한다고 분석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는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로 권력을 잡았다.
독재에서는 방향이 반대로 보인다. 북한에서 의존을 만든 것은 권력이었다. 배급제로 물질적 의존을, 선전과 교육으로 정신적 의존을 설계했다. 그러나 출발이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일단 자리 잡은 권력은 의존을 재생산한다.
4. 마음은 연속적이다
그 배급제가 1990년대 중반 대기근 속에서 무너졌다. 그 무렵 태어나고 자란 이른바 장마당 세대는 국가가 아니라 시장에 기대어 살아남았다. 학교에서 생각을 배운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정권은 이 세대를 두려워한다. 2020년 반동사상문화배격법, 2021년 청년교양보장법, 2023년 평양문화어보호법이 그것을 증명한다. 청년의 생각과 문화와 말투까지 법으로 단속하는 정권은 그 청년들이 이미 달라졌음을 알고 있다.
이 세대에게는 의심하는 힘과 각자도생의 마음이 함께 자란다. 인간의 마음은 복합적이다. 그리고 연속적이다. 외적 저항은 언제나 내적 이탈 뒤에 온다.
하벨은 공산 체제에서 믿지도 않는 당 구호를 가게 창문에 붙이는 채소 가게 주인을 이야기했다. 체제는 그가 구호를 떼는 날, 진실 속에 살기 시작하는 날 흔들린다. 쿠란은 사람들이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 체제를 지지하는 '선호 위장'을 설명했다. 숨겨진 속마음은 조용히 쌓이다가 어느 순간 한꺼번에 터진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이유다.
마음은 연속적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불연속적으로 보인다. 바깥에서 북한을 보는 사람들이 "아직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연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연속은 앞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바깥의 위협이 커지면 불만을 품은 사람도 다시 체제 쪽으로 기댄다. 정치학이 말하는 결집 효과다. 압박은 마음을 뒤로 끌어당기고, 접촉은 마음을 앞으로 민다. 지금 그 마음은 앞으로 밀리면서 동시에 뒤로 당겨지고 있다. 그리고 뒤로 당기는 힘은 언젠가 앞으로 미는 힘으로 반등할 것이다.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5. 사이클과 나선
정치 진영의 부침은 사이클이다. 그런데 이 사이클은 본래 정해진 것이 아니다. 불균형을 고치려는 교정이 지나칠 때 생긴다. 사람들은 한쪽의 과잉을 바로잡는 데 몰두하다가 그 교정 자체가 주된 흐름이 되어 버린다. 주객이 뒤바뀌는 것이다. 그 지나침을 키우는 연료가 의존이다. 동조와 선동에 휩쓸리는 시민이 많을수록 진폭은 커진다.
그러나 역사는 제자리만 돌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 보통선거, 인권은 되돌아가지 않았다. 사이클은 오르내리면서 조금씩 올라가는 나선이 된다. 그 상승분을 만드는 것은 진영이 아니라 발전하는 역량, 곧 본래 뜻의 진보다.
그 상승분이 남는 이유도 보아야 한다. 영국 노동당이 만든 복지국가를 1950년대 보수당 정부가 이어받았다. 미국 뉴딜의 사회보장제도는 이후 어느 정부도 없애지 못했다. 한국에서 1987년 이전의 체육관 선거로 되돌리자는 진영은 없다. 나아가는 힘이 톱니바퀴를 돌리고, 지키는 힘이 멈춤쇠가 되어 톱니바퀴가 거꾸로 돌지 않게 붙잡는다. 보수가 진정 보수다워지는 순간은 퇴보를 고집할 때가 아니라 앞선 세대의 발전을 지켜낼 때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느 한 진영을 향한 말이 아니다. 공포와 의존으로 세를 얻은 정치 세력은, 진영과 상관없이, 더 나은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결국 무너진다.
6. 생각하는 교육
의존이 권력을 부른다면 해법은 제도보다 시민에게 있다. 권력 분립도 언론 자유도 기대고 싶어 하는 시민 앞에서는 무력하다. 좋은 시민은 교육이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교육은 학력이 아니다. 나치 독일에서 의사의 약 45퍼센트가 나치당에 가입했다.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는 과학 지식과 수리 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기후변화 문제에서 진영에 따라 더 극단적으로 갈라졌다. 지식은 판단을 바꾸지 못하고, 이미 기댄 쪽을 지키는 무기가 되었다. 그들에게 없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교육이었다.
생각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시민은 자기 세계보다 조금만 더 넓은 세계와 마주쳐도 기댈 곳을 찾는다. 문제는 세계의 넓이가 아니라 자기 세계와 마주친 세계 사이의 낙차다. 그 낙차를 감당할 힘이 없으면 사람은 틈을 메워 줄 누군가를 찾는다. 성직자일 수도, 정치인일 수도, 유튜버일 수도 있다.
한국의 입시 교육은 어떤가. 정답은 정해져 있고, 정답은 출제자라는 권위가 쥐고 있다. 학생은 12년 동안 정답을 쥔 권위에 기대는 법을 훈련받는다. 의존을 끊는 교육이 아니라 의존을 길러 내는 교육이다. 학교가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치를 겪은 독일은 1976년 보이텔스바흐 합의로 정치 교육의 원칙을 세웠다. 주입하지 말 것, 사회에서 논쟁적인 것은 교실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룰 것, 학생이 스스로 자기 이해관계를 판단하게 할 것. 프랑스의 고교 졸업생은 정답 없는 철학 질문 앞에서 네 시간 동안 논술을 쓴다. 생각하는 교육이란 결국 불확실성을 견디는 훈련이다. 답이 없는 상태에서 서둘러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는 힘이다.
생각하는 힘은 학교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4·19와 6월 항쟁의 시민들, 그리고 장마당의 청년들은 경험으로 생각을 배웠다. 학교가 할 일은 그 경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미지를 안전하게 여러 번 겪게 하는 것이다. 낙차를 견디는 근육을 길러 주는 것이다.
맺으며
다시 처음의 장면으로 돌아가자. "그건 진보 쪽 주장이잖아." 그 한마디로 판단을 끝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만 생각하는 대신 기대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과학은 미지를 찾아가고 신앙은 미지에 기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이름에 기대는 시민이 많을수록 권력은 커지고 사이클은 거칠어진다. 미지 앞에서 기대지 않고 걸어가는 시민이 많을수록 사회는 흔들리면서도 조금씩 올라간다.
진보라는 말을 되찾는 일은 단어 하나를 고치는 일이 아니다. 생각을 되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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