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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9일 월요일

호세무히카 / 국민철학과 그리스디폴트

그리스의 디폴트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은행의 업무는 중단되고 신용카드가 통용이 안되어 ATM기 앞에는 현금을 찾을려는 긴행렬이 섰다고 한다. 얼마전까지 그리스의 위기가 과잉복지때문이라는 한국정치인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국 예산부족때문이라는 말이었고, 그리스의 탈세는 심각할 정도로 심했다고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택에 수영장을 갖고 싶어하고, 수영장에 세금을 부과했는데, 아테네 북부지역의 신고된 수영장이 300개가 조금 넘었다고 한다. 나중에 구글어스로 조사해보니 1만개가 넘는 수영장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영장을 다시 공중에서 포착이 안되도록 숨기는 작업들을 했다고 한다.

그리스는 유로존의 지도자격인 독일보다 임금이 낮고 근로시간이 길다고 한다. 물론 복지수준도 독일보다 부족하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다소 사회공리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독일은 문제가 있으면 자정(自訂)노력을 멈추지 않는듯 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그리스는 '능력이 있는자는 부패와 탈선에 앞장선다'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는듯 하다. 낙천성이 강한 지중해연안의 남부유럽들이 대체로 분위기가 그런듯 하다.

1982년 하이에크가 카토 재단과의 인터뷰자리에서 통화론자이자 신자유주의경제학자인 프리드먼을 이렇게 비판했다고 한다.

"지금 후회하는 것은, 내 동지이자 친구인 프리드먼이 실증경제학을 언급했을 때 내가 비판하지 않았던 일이다. 프리드먼의 실증경제학은 우리가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지혜롭게 대처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상이나 다름없다. "

부패와 탈세로 국기(國氣)를 어지럽히는 국민과 일하는 국민들 사이에는 빈부격차 이전에 정보의 비대칭현상이 존재한다. 비용편익(費用便益)의 법칙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는데, 일탈행위로 부(富)를 창조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노력한 만큼 그에 관한 정보를 얻어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닌듯 하다. 한국의 부정부패수준도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는 증거가 속속들이 들어나고 있는데,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권력의 주위에 부정부패가 심각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의 문제를 결코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해석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

하이에크의 말처럼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이 정당할려면 모든 국민이 동등한 정보수혜자가 되거나 그에 앞서 경제적인 정보를 다스릴 수 있는 도덕적인 가치관이 필요한데, 그리스는 독일보다 많이 부족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국도 만만치 않다. 아직도 그 문제를 끌고 다녀서 미안하지만 해결이 안되는 문제들, 지난 정부의 국기문란행위, 현정부에서 드러난 엘리트들의 부패행위등은 현실로 일어난 사건들에 앞서서, 도덕철학이나 도덕적 감수성의 부재(不在)가 만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항상 토로하지만 권력지향적 사고나 물질만능주의적 사고를 막아내지 못한 과거 한국교육의 문제는 언젠가 그리스와 같은 사태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극단적으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성장과 국민잠재력을 저하시키는 작용은 분명히 할 것 같다.

호세무히카 우르과이 전대통령은 "철학은 이제 유행이 아닙니다. 철학없이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철학에는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을 바라보며,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문제보다 철학의 문제는 더 중요한듯 하다. 내 자신은 빈곤한 철학이 빈곤한 삶을 이끄는 장면도 적지않게 목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분배의 문제보다 철학의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전에 나는 항상 은행 국유화만 계획하던 좌파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르과이 은행 시스템을 분석해보면 놀라운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은행 거래량의 52퍼센트는 정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앙은행은 총 은행 거래량의 40퍼센트를 흡수합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래량이지요. 그래서 나는 좌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만 멈추세요. 은행이 힘차게 돌아가는 이 마당에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시험해봅시다."

중략

"저는 열정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시민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그 일의 사회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게 그들의 참여를 일깨워야만 합니다. "

- 미구엘 앙헬 캄포도니코가 지은 호세무히카 우르과이 전대통령의  전기 중에서 -

지난 10여년 이상을 인터넷으로 말하는 자 인터넷으로 통제받는 현상을 지금까지도 경험하곤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옳고 그른 것은 결국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쁜 상황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려고 노력하는 내 입장으로는 내 자신의 철학을 끌어안고 개선시켜야 하는 노력이 힘겹다는 생각을 하는데, 누구에게 철학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그런 태도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기도 한 것 같다.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삶이라는 말을 하면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겠다.

호세무히카 대통령은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은 돼지나 다른 동물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똑같은 존재예요. 유일한 차이란, 인간은 자기 삶을 스스로 빚을 수 있다는 정도겠지요. 인간은 자기 삶을 리모델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로 보자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역시 부분적으로 리모델링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의식이 없는게 좋을 겁니다. 가능성이 없다면 우리는 불안에 굴복했을 테고, 인생 또한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2015년 6월 27일 토요일

호세무히카 / 사회적 합의

남북한의 이념문제와 관련된 기묘하고 살벌한 경험으로 트라우마를 입은 부친의 대를 이어 이런 저런 상황을 겪은 내 관점으로는 선량한 우루과이 국민에게 호세무히카 대통령은 하늘이 내린 복덩어리라고 호들갑스러운 표현을 해본다. 근로현장이나 지인들과의 대화중에 여유로운 태도를 구경해보지 못한 내 자신도 많은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것 같다. 그게 어디 나 뿐인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경쟁이나 투쟁을 해야 하는 환경은 어떤 목적으로 미화시켜도 반갑지 않은 환경인듯 하다.

내가 로차에서 체포되었을 때 어떤 장군이 유치장에 찾아와서 했던 말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그가 말하길, 몇몇 아르헨티나 장교들이 그 군사기지를 방문했었답니다. 유치장에 달려 있던 조그만 창문을 통해서 나를 지켜봤답니다. 그러더니 그들이 장군에게 말하더래요. '아르헨티나에서라면 이런 새끼들은 10미터 물속으로 쳐박았을 겁니다.' 다행히도 그 장군은 우리 우르과이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고 내게 말하더군요. 물론 아르헨티나 군부와 동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들은 분명 달랐습니다.

우르과이에서 생명의 가치는 매우 큽니다. 우르과이는 1904년부터 인간생명과 관련된 몇 가지 진보적 가치를 새겨넣는 데 성공했어요. 심지어 우르과이보다 훨씬 더 발전한 국가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한 가치들을 획득해낸 것이지요. 미국이나 일부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봐도 우르과이가 훨씬 더 선진적입니다. 이와 관련해선 20세기 초반 20 ~ 30년간의 역사에 대해 살펴봐야 합니다. 그 시대는 바트예의 시대로, 지나간 19세기에 대해 수많은 반성을 했던 시대이지요. 19세기는 '피빛 세기'로 불렸습니다. 아마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훨씬 더 많이 싸웠을 겁니다. 인간의 생명 역시 별로 존중받지 못했을테고요. 나는 1920년 에레라의 발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낡은 부대에 새 술 채우기'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바트예를 비난했었지요. 그 시대에 이미 그러한 비판이 가능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문화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일들을 아르헨티나에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지요."

- 미구엘 앙헬 캄포도니코가 지은 호세무히카 전기 중에서 -  

한반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도 상당히 살벌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언젠가 한 번 언급했던 중학교시절 외국잡지에 나온 하코보띠베르만이라는 유태인 사업가가 아르헨티나 감옥에서 겪은 인권침해 상황이 어린 학생의 관점으로도 그게 뭐 대단한가 싶을 정도로 한반도에 비해서는 여유로웠지만 인간 생명을 보는 관점이 우르과이 보다는 아르헨티나에서 더욱 경직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교양이라고는 전혀 없는 근로현장에서 특별한 군대출신의 구성원과 무시무시한 충돌을 한 적이 있었는데, 순한 마음으로 웃고 있는 나를 자신보다 더 잔혹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일을 겪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들이 자신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함으로써 많이 왜곡되는 현상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 625전쟁이나 북한의 참혹한 인권상황, 한국에서 있었던 518민주항쟁, 그 외에도 많은 사건들을 생각하면 우르과이 보다 생명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념문제때문에 왜곡되는 한반도에서 호세무히카같은 지도자가 나오기 힘든 이유를 알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갖추려는 노력은 숙명적으로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 지인과 어떤 대화를 하다가 느꼈는데, 정치관계를 생활관계로 보지않고 권력관계로 보는 한은 절대로 사회적 합의가 나올 수 없고, 오직 투쟁관계만이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5년 6월 26일 금요일

호세무히카 / 좌파적 이해에서 전체적 이해로

우루구아이 전직 대통령 호세무히카는 도시게릴라출신이다. 좌파라고 불리는 극단적인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우파적인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대통령도 되었고, 우루구아이를 잘 이끌어 온 것으로 우루구아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지도자다. 무욕(無慾)의 철학자와 같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13년이란 오랜세월을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깊은 것을 깨달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좌파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무장투쟁을 하는 격렬한 환경에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감옥의 독방에서 생각한듯 하다. 평범하거나 다양한 일상에 묻혀있으면 사색의 깊이는 얕은 희망과 재미에 휩쓸리기 마련인데 호세무히카대통령은  오랫동안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적인 투쟁으로 고난을 경험하고, 수감생활로 고독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삶을 통찰하고,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게 된 성인(聖人)을 평범한 일상적인 사람의 생각으로 해설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전기를 읽다가 이념문제와 관련해서 몇가지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쉽게 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나의 존재방식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어떤 정보를 이미지로 받아들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들이란 언제나 단순한 법이지요. 따라서 단순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들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쉽게 접근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푼타 카레타스의 감옥에서 배웠습니다. 누군가 감옥에 들어가면 다시 나갈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그 공동체를 돌봐야 합니다. 그러려면 생각을 간단히 전달해야만 하지요. 그들의 은어와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필요에 의해 나타난 것들은 통합되고 고유한 스타일로 바뀝니다.

단순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안다면 모든 이들과 소통하게 되지요. 일부 계층이나 한정된 집단하고만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정치는 매우 분명한 소통의 방식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이 어떤 주제가 되었든 그와 상관있는 사람들은 물론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의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는 말하고 있는 내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무엇이 남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 남는 것이란 그들을 발전시키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시키며, 그들에게 근본적인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인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의사소통은 진지한 작업이어야 해요. 말의 형식과 운용이 아니라 서로가 인간 창조물을 바라보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단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첫번째 단계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TV방송에 출현할 기회를 얻는다면, 그게 단 1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라도 채찍질처럼 선명하게 남는 어떤 생각을 내놓아야 합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너무 단순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동일한 것들입니다. 오래된 로맨스에서 피어나는 새롭고 영원한 꽃, 그것이 삶입니다. 피어나고, 피어나고, 피어납니다."

"독방에서 보냈던 고독의 세월 역시 나를 더 사색적으로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상태에서 7년을 보냈지요. 그 다음에 독서가 허락되었을 때는 과학, 화학, 물리, 수학책들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오만가지 책 속에 파묻혀 모두 읽어댔습니다. 나는 13년동안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언제나 계속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는 그때보다 덜 읽습니다. 여기 의회에서 나는 정세 문제에 갇혀 있습니다."

- 미구엘 앙헬 캄포도니코가 지은 호세무히카의 전기 중에서 -

단순한 환경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보이며, 단순함이 곧 본질적이기도 하며, 본질적인 것이 전체적이기도 하다는 호세무히카 전 대통령의 통찰력이 엿보이는 부분인 것 같다. 국가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은 '인간적인 기준'내에서 존중 받아야 하며, 이념적으로 편파성을 띤 가치는 호세무히카 전 대통령의 표현에 따르면 변증법의 덫에 걸려 편파성을 띤 상대(적)를 창조하게 되는듯 하다. 호세무히카는 도시게릴라전투단을 이끌면서 조직이 커지면 상대가 더욱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면서 함께 방법을 다듬어 나간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호세무히카 대통령은 우군과 적군의 상대성을 통찰하고  본질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로서 존경받는듯 하다.

2015년 6월 20일 토요일

자발적 집중 / 미라이공업

어느 날 일본 미라이공업의 야마다아키오 사장이 인간과 인생을 잘 이해하고 있는 현인(炫人)으로서 배울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권력관계나 물질관계에 집착하며 에너지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야마다사장의 용안술(用人術)이 빛난다는 생각이 든다. 돈과 복지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해서 그것들을 가져가게 하고, 그런 시스템을 운영하고자 했던 야마다사장의 목적도 달성하고 해서 미라이공업은 전체시스템과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얻어나가는데 성공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야마다사장의 하루 일과는 출근해서 연극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일로 시작을 한다고 한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라이공업이란 무대에서 막이 오르면 연기는 배우인 직원에게 맡겨야 한다는 야마다사장의 언급에서 표현했듯이 야마다사장의 인생도 연극이며 야마다사장은 그 연극속의 배우일뿐이고, 쓸데없는 집착들을 내려놓는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인생이란 연극속에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가진것을 상실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고생하는듯 하다. 그래서 더 높은 지위나 더 많은 재산으로 안전을 보장할려는 노력을 하는듯 하다. 그런 보편적인 생각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낸 것이 야마다사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미라이공업만의 이야기가 아닌듯 하다. 구글과 같은 직원들의 자발적 창조성을 잘 끌어내는 기업들은 욕망으로 조급해져서 경직되어가는 인간의 두뇌를 충분히 이완시켜주는 기술(?)을 잘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서로 비교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데다가 경제적인 혜택과 자아실현의 보너스까지 주는 곳이라면 직원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고 싶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닌듯 하다. 국가와 사회가 미라이공업같은 무대라면 살아갈만한, 그리고 충성할만한 무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란 분명하게 악하지도 않고, 분명하게 선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확실한 것은 사회전체가 욕망으로 부글대며 방황하거나 투쟁하고 있으면 각자의 구성원이 그런 불쾌한 유행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이념문제로 망가진 북한과 같은 사회도 이면에는 잘 살아보겠다는 구성원들의 성급한 노력이 역기능을 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 6월 19일 금요일

부르면 대답하겠지 / 토인비의 일본평가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4.14 - 1975.10.22)는 일본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평가를 했던것 같다. 토인비의 역사연구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일본은 패전을 딛고 눈부신 경제성장의 극성기에 있을때였다. 토인비는 일본이 끊임없이 서양에 대해서 배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병을 고쳐나간다고 일본인들의 경제적 자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때 아편전쟁을 통하여 서양이 군사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서양이 경제활동의 면에서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2차대전에 패전을 하고 나서도 일본은 자신들을 패배시킨 서양(특히 미국인듯 하다)의 경제적인 적극성을 본받아 경제성장에 전력을 다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결과 미국마져 위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토인비는 일본은 서양에서 일본을 생각하는 '경제적인 동물'이라는 평가와는 달리 철학과 종교(신도나 불교 또는 유교)에 의해 부과된 절도가 바탕이 되어 서양의 병을 고치고 있다고 말한다. 영국은 일본처럼 자원의 혜택이 없고 무역에 의존하는 섬나라로서 산업혁명의 부흥을 이루어냈고, 빈부격차라는 계층간의 분열도 낳았는데,노동자가 혹사당하는 역사적인 상처를 아직 잊지 못하는 반면에 일본의 산업혁명은 고용자의 노동자에 대한 온정이 배려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일본의 사회적 관계를 완화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동양적인 가족적 온정주의는 한 때 전세계적으로 본받아야 할 점으로 알려지기도 했던것 같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하는 주군에 봉사하고, 주군은 신하를 책임져 주는 봉건적인 일본의 문화가 바탕이 되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듯 하다. 그런 탓인지 일본인들의 정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그렇게 신랄하지도 않으며, 정부의 국민에 대한 책임은 그렇게 소홀하지도 않은 것 같다. 확실히 일본은 사회적인 결속력이 뛰어난 점은 있는듯 하다. 하지만 토인비 사후 40여년이 지나서 생각해 보건데, 일본의 경제가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정치적인 성향마져 보수적으로 회귀할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토인비가 생각했던 일본의 강점은 약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는듯 하다.

더구나 일본이 한창 경제적인 부흥을 할 당시에는 서양의 강대국들이나 동양의 중국이나 특히 한국같은 나라들이 냉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반면에 일본은 냉전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 놓인 점도 일본이 경제적인 부흥과 더불어 사회적인 결속력도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국이 아직도 분단된 상황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스트레스나 방위비 소모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일본은 좋은 시절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토인비는 자신이 지어낸 말로 알고 있었던 "부르면 대답한다."라는 말이 훗날 브라우닝의 시 [Master Hughes of Saxe Gotha]의 넷째 절에서, 불러보렴, 누가 대답을 하겠지......란 말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런것 같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역사란 보고 배우고, 잘못된 것을 고치고 개혁하며 발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전을 부르면 발전이 대답하고, 퇴보를 부르면 퇴보가 대답하겠지......

2015년 6월 13일 토요일

소국적 분파주의(narrow sectism)

살아오면서 참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는 일찍이 남북한 문제와 관련된 이념문제에 관점을 붙들어 놓은 일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다른 일들이 차지할 삶의 공간을 이념문제가 자리를 잡으며, 생각해도 그만이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만인 수많은 일상에 생각을 낭비하지 않은 일은 나름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는데, 좁은 관점이 발단이 된 내부투쟁에 시달리는 지인들이나 정치판을 볼때면 공리적 관점으로는 우려스러운 면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처지(그래서 많은 것을 잃기도 했지만)를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던것 같다..

언젠가 조그만 일터에서 매우 권력적인 성향을 가진 비공식적인 보스가 있었다. 그 보스가 하는 일이 일터의 목적이나 분위기에 도움이 안된다는 믿음과 젊은 협기로 보스와 충돌했는데, 보스는 황급히 주변인들을 끌어모아 분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당시 보스가 권력적인 관점을 가지지 않고, 처음부터 주어진 일에 합당한 목적을 잊지 않았으면 좋았을것을 사태는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나 역시 산이 있으니 산에 오르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은 물론이다.

사실상 계파주의나 분파주의 이면에는 중요한 목적을 잃어버린 목적전치현상 (과정이 목적이 되어버려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현상)이 있고, 공리적인 목적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지킬려는 탐욕이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알 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원대한 이상과 넓은 관점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많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 부대끼다 보면 누구나 산이 있으니 산에 오르는 현상이 생기는데, 그런 소국적(小局的)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유대인 출신 독일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 Arendt 1906 - 1975)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하나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서 정치공동체를 만들지 못하여 박해를 받은 유태인들의 책임론을 역설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말하는 선량한 목적을 가진 공동체랑 자신들의 개별적인 이권(利權)이나 관점이 협소해서 또는 싸움을 위한 싸움을 위해 작은 공동체를 창설하는 분파주의는 치사스러움의 정도에 있어서 비교불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5년 6월 12일 금요일

원리주의라는 퇴보의 길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도를 넘은 이념적 편향성이나 종교적 편향성은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마성(魔性)을 띈다. 발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숙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지속에서 더 바람직한 정의와 선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찰하고 성찰하는 수고를 감당한다. 노력은 고결하고, 반성도 고결하다. 그러나 이념이나 종교에 수고로움없이 의탁함은 편안하고 쉽게 가는 길을 알려주지만 그 때문에 사악해질 수 있음을 종종 잊는듯 하다.

도를 넘은 이념에 의탁한 북한, 도를 넘은 종교에 의탁한 IS등은 그런 길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는듯 하다.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서수적(序數的)인 연속성의 관점으로 판단하건데, 한국사회나 그밖에 합리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려고 하는 많은 국가와 사회에서 그리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맹목적인 믿음으로 쉽게 갈려고 하다가 상황을 어지럽히는 일을 많이 관찰한다.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인 편향성을 띈 정치인이 등장하면 국가질서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당연한듯 하다. 이념적 종교적 열정은 생각하지 않는 믿음에 의탁하여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그 열정이 장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들 세계에서만의 판단이다. 더 넓은 시야로 판단하면 무기력한 안일함일 수도 있는듯 하다.

생명의 흐름과 개인을 갈라놓는 것은 과거와 자아에 연연하고, 타성이 주는 안일함에 매달리는 태도다. 악마를 뜻하는 'devil'이란 단어의 어원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devil'은 떼어내다. 동강내다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diabollein'에서 온 말이다. 복잡성을 억눌러서 자꾸 단순한 것으로 토막내는 게 악마의 주특기다.

- Mihaly Csikszentmihalyi (시카고 대학 심리학, 교육학 교수)의 Finding Flow중에서 - 

다양성과 복잡성에서 생명력과 진화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 정당한듯하다. 민주주의 국가기 정당함은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기 때문인듯 하다.  

2015년 6월 6일 토요일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는 것이 행복했노라 / 아들러

사람들의 권력지향성에 대해서는 재미있고 황당한 경험을 많이 하는 편이다. 특히 중년 이상 한국인들의 권력지향성은 두고 두고 언급을 하면서 현실에서 불쾌했던 경험들에 대해서 카타르시스도 많이 느끼는 편이다. 하지만 최초의 공식적 심리학자인 분트(Wundt, Wihelm, 1832.8.16 - 1920.8.31)는  "모든 심리학은 우선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나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그 알량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나서는 좀 더 진화했을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프로이트 보다는 조금 덜 유명한듯 하지만 프로이트 보다는 현실감있는 이론을 많이 내놓은 심리학자 아들러(Adler Alfred, 1870.2.7 - 1937.5.28)는 사람들은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서 남 보다 우월해질려고 하는 심리 외에도 세상을 창조하고 고난을 극복할려는 동기로도 우월함을 추구할려고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열등감을 극복할려고 하는 우월감을 추구하는 태도는 개인과 사회의 병폐로 나타나고,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동기로 우월감을 추구하는 태도는 사회발전을 위해서 유익한 일인듯 하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경쟁과 권력을 탐하는 태도는 창조성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북한과 한국에서 자주 보이는듯 하다. 저번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북한은 외부의 간섭에 민감한 태도를 오랫동안 보이고 있는데,일제시대를 겪은 한반도의 좋지않은 경험들을 오랫동안 과거지향적으로 안고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부정부패라는 일탈행위등을 통해서라도 남 보다 우월해질려고 노력하는 한국인의 출세지향적인 사고는 중년 이전의 세대들이 한참 사회를 배워갈 시기에 있었던 사회가 '권력관계'라는 관점으로 집중되어 유지되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인들의 출세지향적인 일탈은 매스컴에 많이 알려져 있다. 사회의 저변에 시민들의 삶속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생각을 해봤는데,시민들의 삶은 출세지향성에 있어서도 역시 확고한 피라미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경험을 많이 하곤한다. 상하관계 또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점이 공리(共利)라는 관점으로 대체되지 않으면 사회붕괴의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5년 6월 5일 금요일

극단성과 군중심리

게으르거나 지적(知的)인 의지력이 떨어질수록 극단성과 군중심리에 휘둘리기 쉬운 현상을 많이 목격한다. 그런 성향은 생래적(生來的)능력과는 다른 문제로 보인다. 끊임없는 자발적 사고와 끊임없는 자발적 행동을 위한 에너지를 상실한 문제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어떤 인물을 극단적으로 추종하는 행위속에는 기대감과 더불어 '책임회피'라는 심리가 군중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떤 리더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군중들은 공포스러운 면이 있는듯 하다. 특히 한국같은 이념사회에서는 추종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가 대칭적으로 공존하기 쉬운 면이 있는듯 하다.

능숙한 일일수록 거기에 투입되는 에너지의 양은 줄어든다. 수많은 두뇌연구결과들은 특정행동과 관련된 활동패턴은 기술이 늘어나면서 두뇌영역의 개입이 줄어드는 식으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재능도 비숫한 효과를 낸다. 같은 문제를 풀 때 똑똑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덜 노력한다. '최소노력의 법칙(law of least effort)'은 인지적, 신체적 노력에도 적용된다. 이 법칙에 따르면 똑같은 목표를 성취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을 때, 사람들은 가장 힘들이지 않는 방법을 선호한다. 행동경제학의 차원에서 보면 노력은 비용이며, 기술습득은 혜택과 비용의 균형에 의해 추진된다. 게으름은 우리 본성 깊숙이 박혀 있다.

- Danial Kahneman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정해진 패턴속으로 안주할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행복'이란 단어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듯 하다. 그 사람들은 열정과 변화를 회피한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 그런 리더가 이끌어가는 사회는 시차(時差)를 두고서라도 댓가를 치루는듯 하다. 여기서 '댓가'라는 것의 의미는 사람들이 원했던 무엇인가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군중심리에 휩쓸려 얻을려고 했던 것이 장기적으로 상실한 사태가 벌어진다.

이념적인 리더나 군중들은 게으름의 표상인듯 하다. 이미 심각한 문제에 빠진 북한이나 개혁이 필요한 한국은 '극단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시급할듯 하다. 한반도에서 이념이라는 관념은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의 가능성과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찰하여 개선할 수 있는 습관, 또는 능력을 감소시키는듯 하다. 이러한 불합리성의 댓가는 장기적으로 치르기 때문에 위협적인 조짐을 느끼지 못하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