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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5일 토요일

등소평의 철도개혁

문화대혁명과 4인방의 전횡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모택동은 등소평에게 중국을 전면적으로 개혁시킬것을 부탁했다. 모택동은 당시 정치적 세력을 가지고 있던 강청을 통찰하고 있었다. "장차 강청은 모든 사람들과 사이가 멀어질 것이야. 현재 사람들 또한 그녀를 무성의하게 대하고 있어. 내가 죽은 이후 그녀는 시끄러운 일을 일으킬 거야."

통찰력은 있지만 노쇄해서 중국을 개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던 모택동은 등소평에게 중국을 개혁시킬 소임을 맡겼는데, 주은래는 등소평을 "큰 일을 간단히 처리한다."는 표현으로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등소평은 파벌성이 강한 지도자집단과 투쟁해야하는 어려움과 대국의 개혁이라는 넘어야 할 산들이 이중으로 막혀 있었다. 등소평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유효한 규칙과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등소평은 먼저 기간산업의 전위적인 역할을 하는 철도개혁부터 시작했는데,1975년3월 5일의 회의석상에서 공업체계의 문제점과 파벌성에 대해서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특히 파벌성에 관한 선전포고는 문화혁명을 일으킨 극좌세력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는데, 문화혁명기에 큰 시련을 겪은 등소평으로서는 개인적으로 문화혁명세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겠지만 당장은 극좌이념으로 무장한 문혁세력이 중국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연설문 속에서 제대로된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주의를 표현하고 있었지만 수정주의 이념의 과격한 표현은 개혁에 도움이 안됨을 알고 점층적인 수정주의과정을 표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철도개혁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모택동은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등소평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정치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당신과 함께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등소평이라고 하는데 그는 전쟁을 할 줄도 알고, 반 수정주의자입니다. 홍위병이 그를 괴롭혔지만 현재는 무사합니다. 여러 해 동안 타도되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를 필요로 합니다.

모택동은 4월 23일 보고서에서 강청일당이 등소평을 공격하는 구실인 경험주의를 반대하거나 강청일당이 사로잡혀 있는 교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사상적인 해결을 해 주기도 하였다. 4월 27일 회의에서 4인방은 자기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등소평의 개혁과 4인방의 극좌적 교조주의는 최후의 일전을 치룰수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내몰렸다.

40년후의 한국땅에서 해결이 안되는 파벌주의와 이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중국의 본태적(本胎的) 공산주의자들인 모택동과 등소평이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은 아이러니 하지만 이념문제를 떠나서 귀감이 될 만한 것 같다.

- 등소평의 딸 등용이 지은 등소평전기 참조 -

대칭세계(A symmetrical world) 4 / 과잉정보

언젠가 처음 일터에 간 날 서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전직 정보관련된 일을 하던 사람을 소개받았다. 신입인 나에게 위압감을 주기위해 밝혔던 것 같은데, 별로 애착이 안가는 정치지도자의 감시시스템을 적절히 경험했던 이유로 함박웃음을 짓고 말았다. 

[THE SNOWDEN FILES]에 따르면   동독이 붕괴될 무렵에 시민 6.5명중 1명이 정보원이었다고 하고 1989년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치요원은 9만5천명이었다고 한다. 슈타치는 우편주소 2800개를 감시하고 하루에 편지90000통을 열어봤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무척 고된 일이었고 수집된 방대한 정보는 정보가치가 없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정보의 가용성에 쉽사리 이끌려 끝없이 새로운 사실을 찾고 모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면서 이미 확보한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다. 그 결과 우리는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정보를 모으고 그러다가 일정한 때가 되면 정보의 홍수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 해결책은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미 확보한 정보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활용을 위한 정보의 질적 수준이다.

- 틸만 노이셀러 -

미국정보기관 NSA에서 일하던 스노든의 폭로는 충격적이었고, NSA는 동맹국까지 무차별적으로 얻어낸 방대한 정보의 양에 비해 이익을 별로 못본듯 하다. 미국이란 국가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동맹국들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얻어낸 정보는 중요한 내용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과 그 내용들이 시간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가치를 보유한다는 명확한 신뢰가 있지 않는 한 별로 도움이 안되는 것으로 판명된것 같다. 

사람을 사귀다보면 정직하고 의지가 뚜렷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쉴새없이 간계(姦計)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전자는 존경받고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후자는 놀림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끝을 본다. 다만 응대했던 시간과 비용은 후회로서 남기도 한다. 얕은 술책들로 뚜렷한 목적을 이기는 방법은 없는듯 하다.

2015년 4월 24일 금요일

대칭세계(A symmetrical world) 3 / 직관과 실증

한때 북한이 천리마운동이나 속도전운동등으로 국민감정을 부양시키기위해 노력하더니 검증된 결과를 피드백 시키지 못해서 결국은 파탄지경에 이른것은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경제적 실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집권주체는 버티고 있으므로 정치적인 관점으로 보면 체제유지에는 성공하고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 김정일의 통치시기는 김일성의 개척적인 성향에 비해서 감성적인 성향을 보여주므로서 문제를 대처하는 검증된 피드백능력이 떨어졌던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북한은 실증(positive)보다는 직관(nominal intuition)에만 의존함으로서 아주 나쁜 상황속으로 빠져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라고 그런 문제에 자유롭지만은 않은듯 하다. 고질라처럼 거대하게 닥친 한국의 고질병인 정치인들의 부정부패가 절정에 이른 사태가 일어났는데, 형이상학적인 정치적 능력이 직관에만 의존하게 됨으로서 발생한 콩심은데 콩난 사건으로 인식이 된다. 어쩌면 한반도는 실증되지 않는 직관이 난무하는 어두운 미래를 약속하는 땅이 되어가는듯 하다. 정치와 종교와 사기(swindle)는 검증되지 않는 직관으로 연결고리를 맺기쉬운 영역들이라는 생각도 든다. 뭔가 안보여줘도 생기는 문제가 무시되기 때문인듯 하다. 

개인적으로도 정치와 종교가 연관된 정신을 문란시키는 행위에 시달리다가 스포츠로 대응하면서 검증되지 않는 직관을 남발하는 행위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던것 같다. 한쪽에서는 근면 성실하게 아니면 생존을 위해서 노력하는 시민들의 정신을 뭉개는(crush) 영역들에 대해서는 시급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원래 직관이란 나쁜게 아닌듯 하다.직관은 창조의 바탕인듯 하다. 故스티브잡스가 히말리야에 다녀옴으로서, 즉 직관을 갖추는 시간을 보냄으로서 창조적 애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나 비젼을 확실하게 성공으로 연결시킨 손정의, 구글의 직관적경영등은 직관이 과학적 창조영역에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즘에는 기계자체가 통계나 정보를 스스로 학습하고 분석하여 스스로 규칙을 찾고 알고리즘 과정을 거쳐 미래를 예측하는 머신러닝(기계학습 Machine Learning)이라는 기술도 확산되고 있는데, 이런 사례도 직관과 실증이 연계되는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초등학교 4학년의 학력'으로 크게 성공한 일본의 마쓰시다전기의 회장인 故마쓰시다씨가 생전에 제2의 메이지 유신을 일으킬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 [마쓰시다 정경숙]이란 정치인 양성기관을 만들었는데, 만약에 마쓰시다씨가 한국에서 살았다면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억압과 비리의 분위기와 전통을 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리(私利)추구에 만연된 사회와 공리(共利)추구를 받드는 사회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같아 쓴 웃음이 나온다.

직관을 사용하는 인간의 자세, 직관을 검증하는 태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돌아봐야 할듯 하다.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대칭세계(A symmetrical world) 2 / 구글과 동북아시아의 정치문화

구글은 혁신적이다. 구글의 전회장 에릭슈미트(Eric Schmidt)는 전기공학자나 컴퓨터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듯 하다. 구글은 마치 쫒겨가듯이 미래를 위한 창조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에릭슈미트의 저서 [How Google Works]에는 그런 혁신적인 창조행위가 과거나 인간심리와는 전혀 무관하지 않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는듯 하다. 또 북한이라는 국가시스템은 구글과는 완전히 대칭상태에 놓여져 있음을 느끼면서 북한의 변화를 위한 실마리를 구글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지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기는듯 하다. 물론 그 이전에 북한이라는 국가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목적이 제대로 정의되어야 하는 과정이 우선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때는 청년들과 함께 하는 일을 해 보기도 하고, 노인분들과 함께 일해보기도 하였다. 때로는 첨단의 IT회사의 현업(IT업무가 아닌 단순현장업무)에서 서로 대칭되는 부분을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에릭호퍼(Eric Hoffer)처럼 철학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찌하다보니 나의 불찰과 관심사로 그렇게 되었던것 같다. 청년들은 또는 주로 청년들이 일하는 IT회사는 혁신적이다. 미래지향적인 청년의 기질과 첨단기업의 수평적이고 외향적인 분위기는 첨단 IT기업들의 이상향인 구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하였는데, 마음에 와 닿는 놀라운 생각들이 많았던것 같다. 이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진부한 관심사, 진부한 관심대상, 진부한 생활, 진부한 환경등으로 시달린데 대한 대칭적 관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는 동북아시아의 초고령화 현상이 진행되는 이유로 보수성이 점점 강해지고, 일본과 같은 국가는 극우성향을 지니면서 옛추억이 담긴 시절로 회귀하고자 하는데, 이런 진부한 현상들에 대해서는 구글의 경영방식이 좋은 자극제와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미래에 운명을 던져놓는다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생존욕구의 충족방법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음은 에릭슈미트의 저서의 표지에 보이는 구글이 추구하는 몇가지 핵심원리이다.

1, 긍정의 문화를 세워라

호전성과 네거티브경쟁은 장기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소모성향이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좋지않은 결론이 확실한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불상사가 정치세계에는 많이 일어나고 있는듯 하다. 이미 갈등국가의 부정적인 결과를 겪고 있는 북한과 갈등국가로의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일본, 위태로운 한국등은 좀 더 외향적이고 긍정적인 국가분위기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노인은 청년보다 더 부정적이다. 자기혁신의 길이 시간이라는 장벽에 막혀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후손들이나 지구적인 가치에 헌신하고자 하면 좀 더 긍정적인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 폐쇄보다는 공개를 기본으로 설정하라

에릭슈미트는 개방은 혁신으로 기업을 몰고 간다고 한다. 물론 폐쇄는 안주하기 쉽게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북한은 안전을 추구한 것이 불안전을 낳은 결과가 된 경우인데, 혁신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운명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북아 국가들이 보수적성향으로 바뀌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문제인것 같다. 보수성은 폐쇄성을 낳고, 폐쇄성은 후퇴를 의미하는듯 하다.

3,배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을 채용하라

북한은 아예 배움의 길을 막아버렸다. 스스로 생각하는 길을 단절시키고 이념교육만 시킨 결과, 변화를 시도해도 변화를 이끌어나갈 인재가 없는것이 문제가 되는듯 하다. 그래서 점점 시도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지고 위축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듯 한데, 문화자체가 내향적이고 응집성이 강한 일본도 조만간 큰 위기를 맞을듯 하다. 중국은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한국은 북한의 대칭사회로서의 역할을 완전하게 하지 못하고 교육시스템이나 사회구조자체가 자유롭게 배우고 익혀 창조성을 발휘하는 길을 완전하게 열어주지 못하는듯 하다.

4, 고개만 끄덕이는 인형을 조심하라

에릭슈미트는 '조직을 결속하고 궁극적인 결정을 이르게 하는 힘은 서로 다른 의견에서 나온다'고 말하는데, 한국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은 적어도 많은 고민을 했던 문제인것 같다. 언젠가 북한이 개혁할 수 없는 이유중 가장 큰 이유가 '극단적인 숙청'이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국가원로들의 안위를 보장하는 장치가 없다보니 거수기 역할과 지위보전을 위한 권력투쟁이 심각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이념문제가 '다른 의견'을 방해하는 역할을 해 온듯 하다. 상명하복의 문화가 강한 일본은 국민이 알아서 끄덕이는 인형으로 존재하는듯 한데, 많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한국이나 중국에 추월 당하는 문제는 일본 특유의 위계문화가 한 몫 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5, 계급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라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심각한 문제로서 가장 우려되는 점인듯 하다. 모든 것이 서열화되고 수직적인 관계로서 파악되는 사회는 개방적이지도 못하고,동태적이지도 못하며, 창조적이지도 못하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데 가장 방해를 한 문제인듯 하다. 좋은 관계는 수평적이고 평등하며 선량하며 호의적이고 협동적이어야 한다. 속칭 '높은 지위'를 놓고 벌어진 한국기업인의 자살과 연관된 부정부패사건은 수직사회의 출세욕구와 관련된 파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직관계는 '망국(亡國)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혐오스러운 구조인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중장년층 이상의 수직관계에 매몰된 관점에 고개를 저은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평등이나 시민사회같은 단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탕속에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6, 일단 내어놓은 다음 개선하라

내부투쟁에 몰두하는 집단일수록 내향적이며 출세나 지위를 확보하여 안일함을 구하는 성향이 있는듯 하다. 이런 집단은 새로운 시도를 할 수가 없다. 실패는 죽음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새로운 시도가 불가능하다. 복지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미비한 한국에서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열망, 화폐개혁에 실패한 관료를 처형한 북한, 봉건적인 정치사회문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등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이 과감한 창조적 문화를 발휘할 수 없는 이유는 많은듯 하다. 아주 방대하고 깊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듯 하다.


중국에 대해서는 별로 검증된 점도 없고 정치시스템이나 사회시스템이 훨씬 방대하고 변형적이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는 모르지만 구글과 같은 개방모형으로 진행될 경우에는 장기적으로 거대한 경제적 리바이어던을 구경할 가능성이 큰듯 하다. 구글이 중국시장에 진출하였다가 중국의 언론통제와 충돌한 적이 있듯이 이런 점은 현재의 중국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글이 지향하는 원리로서 가장 본질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악해지지 말라"는 표어인듯 하다. 이 말 속에는 훨씬 더 원대한 야망이 있으며, 발전과 성과있는 미래를 보여주는듯 하다. 

2015년 4월 11일 토요일

대칭세계(A symmetrical world) 1 / 아그네스스메들리와 성직자

북한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시간조차도 힘들때가 있다. 오죽했으면 통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한국민들의 마음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고 하고싶지 않은 말조차 하게되는듯 하다. 개방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린 정지된 체제에 관점이 물려들어가는 어두운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는듯 하다. 한국내에서 '종북'이라는 단어는 진짜 종북주의자가 있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사용하던지  어두운 미래에 관점을 옭아매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관점이 물려들어가지 않는 '대칭세계'에 있는것이 다른 쪽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내 자신이 경험한 몇가지의 대칭세계에 관해서 생각해 보았다.  

20여년전 목련이 질무렵에 이념이나 종교와 관련하여 '대칭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여태껏 피력했던 이념이나 종교의 부작용과는 달리 두가지 관념세계의 긍정적인 면을 본 적이 있었다. 나아가서 이념이나 종교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성격이 왜곡되거나 상실되는 문제를 많이 고민했던것 같다.

당시 부친의 말기암으로 한 외국인 카톨릭 성직자분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잠시 지낸적이 있었다. 당시 종교는 없었고, 부친은 한반도의 이념문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불운을 온몸으로 체험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부터 이념문제는 일찌감치 내 생각속의 많은 부분에 들어와 앉았던것 같다. 생각이 깊지 않은 시절에는 '생각이 자기에게 들어와 앉은 것이다'는 표현이 적절한듯 하다. 한 편으로는 부친의 일생을 통해서 한반도의 수많은 민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문제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내 인생의 최소한의 비용을 들이는 것이라는 실용적인 계산을 하게된 계기도 되었던것 같다. 말하자면 부친의 수동적인 태도가 타산지석이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것 같다.

정신적이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부친의 병상옆에서 중국의 홍군에 종군하면서 그 활동을 현지보도했던 미국의 여류평론가 아그네스스메들리의 저서 [Battle Hymn of China]를 잠도 안자고 밑줄을 쳐 가면서 읽고 있었다. 사상이 의심스러웠던 사람은 아니고 당시 신경림씨가 번역했던 책이 원주시내 헌책방에서 5000원짜리가 2500원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눈에 띄어서 골라온 책이었다. 뜻밖에 책의 내용에서 많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던것 같다.

고을을 둘러싼 주위에 널려 있는 보리밭에서 게릴라전의 연습을 하고있던 병사들이 서안으로부터 새로이 달려온 사람들을 보려고 잔뜩 모여들었다. 집단을 이루고 있는 홍군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보아 온 많은 병정들은, 대게가 원기가 없어 보였고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들은 달랐다. 이들 병사들의 얼굴에는 저 위대한 노신(魯迅)의 얼굴에 뚜렷이 나타나 있던, 생기에 찬 경계심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시 밑줄쳤던 책의 내용중의 일부인데, 지금 다시보니 어두운 현실과 무기력감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각오를 다졌던 중국홍군과 당시의 내 기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념이 중요한게 아니라 변화를 갈망하는 생각과 행동의 에너지를 얻어서 또 한 번의 삶을 이어나가는데 도움을 주었던것 같다.

나는 세시간씩 수면을 취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병원장으로 계시던 성직자분은 세시간이하의 수면을 취하면서 무의무탁한 환자들과 입원환자들을 돌보고 있어, 한 편으로는 뭔가 지금 책에 담겨 있는 여걸(女傑) 아그네스스메들리의 발자취나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중국 홍군의 힘을 무색하게 하고 있었다. 종교적인 무욕(無慾)의 이타심을 직접 목격하고는 충격을 많이 받았던것 같다. 그 성직자분은 지금도 변함없이 아니면 더 활발하게  선교와 돌봄의 활동을 하고 계시는듯 한데, 기자들 인터뷰에도 잘 응하지 않으시는 분이라서 근황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같은 진정한 세속인과 진정한 종교인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시켜 주시는 분이기도 한것 같았다.

한 편으로는 종교적이고 이타적인 에너지로 충만한 그 성직자분의 모습과 이념과 혁명적인 에너지로 충만한 아그네스스메들리의 모습은 이념과 종교의 이유를 말없이 웅변해주는 긍정적인 모습이 틀림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4월 4일 토요일

Crush / 불통(Ignorance)의 광대들

오래전 한국은 식민지와 분단을 겪고, 내전의 참화까지 입은 상태에서 국제사회에서 어떤 비루한 대접을 받아도 감내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를 이끌었던 정치지도자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의 머리속에 카리스마와 권위있는 모습으로 영상화되어갔다. 그 당시 국민들의 삶속에는 출세나 권력같은 수직적이고 상대적인 우열관계의 척도를 중시하는 관점들이 지배하고 있었던것 같았다.  군 장교복을 입으면 나이방(레이벤이라는 상표의 선글라스)을 쓰기 바빴고, 작은 기업의 경영주도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옆으로 비낀 모습의 사진을 찍기 바빴다. 현실이 비루할수록 그런 이미지들은 강렬하게 국민들의 상상속을 자리잡기 마련인듯 하다. 그런데 이미테이션들이 너무 흔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만난 보스가 많이 본 사람이었다. 눈으로 봤다는 의미가 아니고 한 시대를 만연했던 권위주의의 표상이었다. 신앙처럼 만연했던 그 상상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위압감을 인식시키기 바빴다. 나중에 기업의 목적은 이윤창출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하는 일 마다 CRUSH(뭉개다)해 버리는 모습에 마음이 언짢아서 속된 표현으로 적나라하게 들이 받았다. 신앙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은 보스는 이후로 삶의 지표를 잃어버리고 회사도 무너지고 많이 방황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일이지만 나는 그런 어리석은 신앙조차도 갖지 못하고 한국사회의 밑바닥에서 내가 누군지도 모른채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가는 곳마다 그 시절 그 추억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습관과 동조(alignment)의 위력이 대단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보수와 진보, 죄파 우파 가릴것 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관점은 '자신의 철학이 담긴 정견(政見)'이 아닌 '인물 중심의 의존적인 정견'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한반도의 민중들이 신앙같은 이념이나 불통(不通)의 정치에 휘둘려야 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사회에 만연한 수직적인 관점이 깨지지 않으면 이제는 CRUSH의 시절이 올 것 같다. 가고자 하는 길과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른채 기계처럼 먹고 살기에 바쁘고, 서로 상대적인 우월감을 갖기위해 싸우다가 기이한 정치지도자에 농락당하고 '멍'해진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