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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8일 월요일

판 옵티콘(원형감옥)의 감시탑


언젠가 남한에 침투한 북한의 특수부대대원이 신비한 일을 겪고 종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 사람의 안정된 삶에 대한 욕망과 신념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은근히 저울질 해 본적이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는 원형감옥안의 감시탑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죄수들은 감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규율하는데, 근대사회에서는 여러분야의 권력이 판 옵티콘처럼 조직되어 있으며 이런 권력망을 인식하는 개인은 감옥의 죄수들과 같이 스스로를 통제한다고 말한다.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은 언제든지 감시 당하는 위치에서 감시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못한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푸코의 이야기는 민주주의 사회나 전체주의 사회가 모두 감시탑이 존재한다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는듯 한데,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나 전체주의 사회 모든 곳에서 존재한다는 감시탑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모든 사회에서 존재하는 만큼 감시의 목적은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이유에서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정보기관은 국익을 위해 감시를 하고 있다는게 일반화된 목적이고 다른 부문에서 존재한다는 감시탑은 그 부문의 이익을 위하여 감시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감시탑이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이유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봤는데, 감시자와 피감시자 사이의 에너지 흐름에 촛점을 맞춰보면 당사자들의 손익(損益)에 간과할 수 없는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을것 같다.

만약 감시탑의 기능이 정적(政敵)을 무력화시킬려는 목적이거나 피감시자를 무력화시켜서 감시자의 권력을 강화시킬려는 목적이라면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기능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서 피감시자가 감시자의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닫혀있는 사회라면 개인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자존심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점의 영역에서만 있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식의 범위가 좁아서 또는 보편적인 욕망이 판옵티콘의 권력이랑 완전히 다른 방향에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푸코의 말을 빌자면 근대사회의 시민들은 여기저기에 조직되어있는 감시망속에서 그 감시망을 스스로 인식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는 감시자가 되어 일상적인 경제활동, 준법, 도덕적행위, 교육등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미리 알아서 숙이고 있다는 뜻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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