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는 말이 없을것을 많이 강조했다. 대동법으로 잘 알려진 이원익선생은 나이가 어느정도 들때까지 말을 못해서 벙어린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말을 하기시작해서 사람들이 놀라워 했더니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많은가 하노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동물같은 군집생활이 아닌 사회생활이 삶의 본질인 인간이 어떻게 말이 없이 살 수 있겠냐만은 이원익선생의 일화는 '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몽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일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도 송나라의 문치주의(文治主義)적인 배경에서 만들어진 성리학을 통치원리로 받아들인 사회에서 자칫하면 담론(談論)중심으로 빠져들어가는 분위기를 경계한듯 하다.
어렸을때 부친은 항상 말을 아끼라는 조언을 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지 않는 편향적인 의사소통으로 신뢰감은 가질수 있을지언정 쌍방의 의사소통을 필요로하는 현대사회의 분위기로 봐서는 '험한 가시밭길'로 걸어가라는 주문을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종종 있었던것 같다.
독일에서 출생한 유태인 정치학자 아렌트(Hanna Arendt 1906 ~ 1975 )는 말이 시작되는 곳에서 정치가 시작되고, 말이 끝나는 곳에서 정치가 끝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의회등을 통해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는 정치적 피드백의 특성상 말(소통)은 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인것 같다. 그런데 이 '말'이 자주 문제가 된다. 정치에 있어서 '말없음'으로 인한 편향적인 의사소통은 아렌트가 말한바 있는 국민의 복종만을 구하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라는 부자유스러운 정치시스템으로 인도하기도 하는것 같다. 한 편으로는 쉴새없이 허언(虛言)과 고성(高聲)이 오가는 정치현실을 목격하고는 환멸을 느끼는 시민들은 말이 없는 정치를 기다리기도 하는데, 그 말이 없음은 '불통'이 아니라 '신뢰'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것 같다.
대중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정치에서 여러가지 매스컴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이나 존재를 표현하여 국민의 표심을 움직이려는 욕망도 문제지만 '신뢰성'이라는 명분으로 권위주의적인 정치시스템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도 문제인것 같다. 어쩌면은 정치인이나 시민들 모두 중용의 평온함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한국사회의 극단적인 욕망에 휘둘리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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