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성장하며 늙고 소멸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엮여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생각의 틀인 사회사상도 생명체로서 생명주기를 가진 인간의 특성에 따라 생명주기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조선왕조는 단일왕조로서는 유래없는 500년이라는 세월을 지탱했다. 그러나 성리학적인 사회의 문리적(文理的)이고 비실용적(非實用的)인 행태가 500년이라는 공업(供業)을 끝내게한 원인으로서 평가되기도 하는것 같다.
조선의 성리학은 고려말에 안향과 이제현등의 학자가 원나라로로부터 도입을 했다고 한다. 유목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남송인을 만인(蠻人)이라하며 천대했던 바와는 달리 충과 효로서 국가 통치이념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남송의 주희가 만든 성리학은 적극적으로 수용했던것 같다.
고려말에 들어온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은 신흥무인세력과 함께 조선을 창업하면서 성리학은 조선의 국가 통치원리로서 양명학이나 고증학과 같은 동류(同類)의 유학사상뿐만 아니라 천주교등 다른 사상이 조선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조선사회의 일관된 지배사상으로서 구실을 했다고 한다.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왕조가 교체되자 기존의 사물의 본질인 성(性)과 이(理)를 연구하는 성리학에서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心卽理)사상을 본질로 하는 양명학으로 지배적인 사회사상이 교체되었다.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검소하고 강건한 만주족들의 성향과 서양의 과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심 사상으로 하는 고증학으로 발전하였는데, 점차 구체적이고 실용적으로 변한듯 하다.
양명학은 조선에 도입되어 정제두, 최명길과 같은 강화학파가 연구하였지만 사회사상으로 널리 받아 들여지기에는 성리학의 기득권적인 장벽이 너무 강했던것 같다. 고증학 역시 조선의 실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대상이 되었지만 성리학적인 조선사회에서 현실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생각해보면 조선 왕조 500년이 태동, 성장, 노쇄의 생명 주기로 이행하는 동안 통치원리인 성리학이 국가의 흥망성쇄와 불가분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듯 하다.
사실은 조선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게 아니고 지금 이 시간에도 국가가 노쇄할때까지 무용(無用)한 통치원리를 놓지않고 있는 정부가 한반도에 있는것을 보면서 망령을 놓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예에서 보듯이 통치원리의 변화는 국가나 왕조의 교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것을 볼때 변화라는 것을 혁명과 유사한 의미로 받아들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변화하지 않아서 '공멸'이나 '외부세력에 의한 변화'까지 예상된다면 매우 불행한 사태가 될것 같다. 36년동안의 시간이 무언가 배우기에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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