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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앙가주망(engagement)/사르트르


'앙가주망'이란 단어 속에는 원래 계약, 서약, 구속의 의미가 담겨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 단어 속에 사회참여, 정치참여라는 의미를 더 부여하고 있다. 어떤 단어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배경에는 그 시대의 고민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사상의 문제점이 제국주의나 군국주의적 패권주의로 반동적 결과를 가져온 시대에 나치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의 고민을 사르트르가 부여한 '앙가주망'의 현실참여적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겠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사전에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하는데, 이러한 자유에는 선택의 책임이 따른다는 우리가 자유에 대해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때로는 수동적인 책임론을 넘어서 이상적인 사회변혁을 위해서 주어진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능동적 책임론까지 이야기 함으로써 자본주의가 고민이었던 그 당시에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었다.

개인이나 사회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문제를 파악하며 개선할려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그러한 개선의 욕구는 자유를 가진 인간의 소명과 같은 거라는 의미가 '앙가주망'이란 단어 속에 담겨있는 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라는 두 관념적 단어가 한국인들에게 주는 복잡하고 불쾌한 경험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념이나 종교가 나쁜 의도로 탄생하거나 전파된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전제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포섭된 개인이나 사회의 '의도'를 정의롭게 설명할 수가 있는것 같다.

문제는 이념이나 종교에 구속받는 동안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던 개인이나 사회의 책임감인것 같다. 개인과 사회는 편리(便利)를 위해서 받아들인것에 구속되어 버리는 악순환을 경험하는게 일반적이다. 모피와 털을 얻기 위해서 들여온 뉴트리아가 생태계의 문제거리로 떠오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비판과 개선을 투입하지 않으면 매피스트가 부여한 '파우스트의 젊음'이 되어버린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생각을 강요하거나 설득을 할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소극적으로 '문제점의 방어' 역할만 할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각자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각자 책임질 수 있는 능력도 키워져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아이와 같은 한국민'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념이나 종교의 그늘에서 비판하고 개선할려는 습관없이 쉬고 있다가, 퍼뜩 새벽별처럼 자아를 깨닫고는 폭발해 버리는 '격정의 습관'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책임감을 느끼도록 훈련되지 않은 결과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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