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최초의 황제이다. 옥타비아누스 이전의 로마는 원로원이 정치를 하였다. 갈리아정복으로 권력을 얻은 시이저가 황제가 될려는 야심을 가지자 공화파의 반대와 양아들 부르투스의 암살로 시이저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이저의 조카딸의 아들인데 시이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시이저가 암살당했을때 나이는 열아홉이었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2차 3두정치를 하였다. 레피두스가 죽고 안토니우스가 방종하게 놀아나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수군을 무찌르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시대를 연다. 로마인들은 그를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 부르며 황제로 추앙하고, 이후 로마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스로 황제가 되려다가 실패한 시이저와 옥타비아누스는 많이 달랐다.옥타비아누스는 시이저에비하여 훨씬 수수하고 온유했다. 시이저는 부하장수들에게 인심을 잘 쓰고 친구처럼 대했는데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시이저의 이런 행실을 본받으면서 벤치마킹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우누스는 경솔하거나 서두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의 말은 항상 [천천히 서둘러라]였다. 그는 또 '대담한 장수보다 안전하고 실수없는 장수가 훌륭한 장수'라고 말하기도 하고 '무엇이든지 충분히 잘 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속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가정적으로 불행했으며 후처인 리비아는 권모술수가 깊었는데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황제 이후 제위는 항상 음모의 대상이 되다가 네로황제 이후 줄리어스가의 혈통이 끊어졌다.
옥타비아누스는 가정적으로 불행했으며 후처인 리비아는 권모술수가 깊었는데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황제 이후 제위는 항상 음모의 대상이 되다가 네로황제 이후 줄리어스가의 혈통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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