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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골프에 관한 우스운 이야기

시각장애인으로서 역경을 딛고 골프를 치는 누군가에게 프로골프 선수가 악수를 청하고 으스대며 한마디 했다. "우리 언제 한 번 시합을 해 봅시다."

그러자 장님골퍼가 말했다. "좋소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어느 날 밤이라도 좋소. 어느 날 밤이라도......."

기타노다케시/검도

오래전에 심신이 완전히 부실한 상태에서 깊은 산골 농가의 마당에서 딱 4개월동안 목검을 들고서 휘두르면서 생각하기를 반복한 적이 있다. 시력이 좋아져서 안경을 벗고 귀가했다. 그리고 나서 대립적인 관점조차도 지워 버리고자 무도(武道)류는 기피할려고 애썼다.   

검도를 했었다는 생각은 안들고 은은하고 처량했던 달빚만 기억난다. 세상을 등져가는  북향인(北鄕人)의 모습을 보고 다시 나가 목검을 휘두르곤 했다. 음력7월14일이었는데 달빛이 참 아름다웠다. 그 달빛이 북조선에서도 같은 달빛이란 생각을 하면서 치졸하고 편협한 인간사에 웃음만 나왔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1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허망함만이 마음을 어지럽히곤 한다. 

기타노다케시의 영화 '피와 뼈'를 대학로 소극장에서 보았다. 조총련의 선동에 속아 북송(北送)이 된 주인공이 북조선 정부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한 겨울의 초라한 오두막에서 죽어갈때, 어린 아들이 밥을 먹다가 아비를 묻고 와서 또 밥을 먹는 모습이 그 당시 내 모습과 묘하게 일치가 되어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기타노다케시의 영화 '자도이치'도 보았는데 검객이 장님처럼 눈을 감고 시각을 닫아야 제대로 된 검의 감각을 살릴 수 있다는 설정이 마음에 와 닿았다.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니체/본능

본능- 집이 불탈때는 사람들은 점심조차 잊어버린다. 그러나 잿더미 위에 앉아 다시 먹는다.

두가지 냉정 - 정신이 메말랐기 때문에 생기는 냉정과, 극기의 결과로 생기는 냉정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전자의 냉정이 기분 언짢은 것이고, 후자의 냉정은 쾌활하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체념한 사람들의 위험 - 자기의 생활을 지나치게 간결한 욕망위에 세우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위나 명예, 동료들 간의 교제,육욕, 안락, 선물 같은 것을 가져다 주는 여러가지 기쁨을 단념해 버리면 그것이 여러 지혜로 발전하기 전에 삶에 대한 권태나 체념으로 나타나기 쉬운 까닭이다.

- 니체 -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보면  거짓된 사회적 평가에 우리의 인식이 길들여져 있음을 알게된다.결국에는 드러나게 되지만 사회악의 가장 추한 모습은 지위와 권력 명예등의 얇은 껍질속에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념이나 종교에 대한 맹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피부인 감정을 억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또 다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분출구를 찾기위해 인간을 자연스러운 상태보다 더 나쁜 상태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 그러다가 그런 '더 나쁜 상태'가 일반화되면 더 나쁜 상태가 자연스러운 상태로 다시 자리잡는다. 그래서 독재자가 나타나며 광신의 종교적 횡포가 등장을 하게 된다.

고결한척 하는 또는 고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면에 더 무서운 추악함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과 불완전성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당연한 것이다. 이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다던 정치가나 종교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다는 종교인이 추하다 못해 극악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감정을 잃어버린 메마른 냉정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념을 추구하고자 또는 어떤 종교를 추구하고자 집착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그 사람의 마음은 이미 스스로를 통제할 권한을 잃어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2012년 10월 19일 금요일

니체/동정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종교단체에서 나온 몇 사람이 P2P를 보여 주면서 소감을 써 달라고 했다. P2P에는 종교단체가 세계와 국내각지에서 선행을 한 일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유명 정치인들의 칭송(?)장면도 담겨져 있었다.

끝까지 보고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결국에는 누군가 알아주지 않겠는가'라는 글을 남겼다. 선행이라는 것은 없는 것 보다 어떤 형태로든지 있는 것이 훨씬 나은 것이지만 선교의 목적으로 광고함은 희생하는 효과가 반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어려운 시절에 나를 도와 줄려고 애쓴 종교적이고 순박한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뭐가 못마땅 했는지 인간은 도와줘봤자라고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다녔다. 어느 날 오래만에 만난 친구에게 내 차 옆에 서있는 고급차를 보여주며 물질적인 성공을 알렸고 그 친구의 얼굴은 낭패감으로 어두워졌음을 느끼면서 배시시 웃었다. 상호 어린 마음에 유치함의 풍작을 거두었다.

다음은 니체의 수상록의 일부이다.

'동정'이 미덕이라고 불리는 것은 퇴폐적인 자들에게만 통하는 말이다. 내가 동정론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 그들이 자칫하면 수치심과 공경과, 타인과의 거리감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잃어버리고 마는 점 때문이다. 동정은 곧 천민의 악취를 풍기며 무례한 짓에 가까워진다.   동정의 손길은 사정에 따라서는 파괴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하나의 커다란 운명 속에, 치명적인 고독 속에, 무거운 죄책감을 지닌 특권 속에  파고둘어 갈 수가 있다. 동정의 극복을 나는 고귀한 덕의 하나로 보고 있다.

동정자- 동정심이 많고 남이 불행에 빠졌을 때에는 도와주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남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드믈다. 남이 행복할 때 그들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잉여인간이며 자기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곧 불만을 느낀다.

니체정도니 이런 미묘한 감정을 촌철하여 글로써 표현하지만 자신은  선행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표현력이 없음이 문제일 것이다. 

2012년 10월 15일 월요일

집중의 원칙

우리의 군대가 적과 마주쳐서 반드시 패배하지 않는 것은  공격과 방어를 적절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가 전개되면 마치 돌로 달걀을 치듯이 적을 격파할 수 있는 것은 집중된 병력을 가지고 분산된 적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 손무 -

일본이 군국주의적 성향을 보이거나 극우파의 영토분쟁촉발행위는 집중의 힘을 끌어내기 위한 애국적(?)행위로 여겨질 수 있겠다. 반면에 이념적인 분란의 피해를 크게 입은 한국은 집중의 원칙을 잊은 결과다. 일본인들은 개인적인 성향에서도 집중의 원칙을 잊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장인정신이나 극도로 절제된 무사적 태도를 중시하는 것, 가업을 계승하여 기술을 축적 시키는 행위등이 집중의 원칙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장성급의 군인사나 고위층의 정책결정자들의 인사가 전적으로 엽관주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면 정치적 행위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목적전치현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국익을 위한 자세가 아닌 라인을 신경써야 하는 자세나 정치적인 인사를 근절시키지 않고서는 국방부문등에서 목적한 바를 이루기 힘들다고 하겠다.

여러가지 인종들이 모인 미국은 집중의 원칙을 달성하기 위해서 애국을 강조하고 군인에 대한 처우를 높임으로서 나름 목적한 바를 달성한다. 유럽은 상호경쟁을 자제함으써 목적한 바에 에너지를 쏟도록 국민을 계몽하고 있다.  권력의 목적이 국민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집중의 원칙을 달성하지 못한다. 이념적 분란이나 지역적인 감정, 종교적 편향성, 성적경쟁등은 집중의 원칙을 어기는 현상이다.

정치행위는 집중의 원칙을 어떻게 실행하느냐에 따라서 애국적 행위와 매국적 행위로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통합의 책임이 그 만큼 크다는 생각이 든다.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귄터그라스

오래전 우울하던 시절에 군복을 입고 신촌거리를 배회하다가 이대옆의 대흥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양철북'이란 영화였는데 독일의 대문호인 귄터그라스의 노벨상 수상작을 영화화한 것이었다. 헤르만헤세와 라마르크는 좋아했던 시절이지만 귄터그라스는 그 이후도 오랫동안 권터그라스라고 발음할 정도로 잘 모르던 작가였다.

그 시절에 힘들었고 양철북의 내용도 잘 이해를 못할 정도로 정신적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오랜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귄터그라스의 전집을 읽으며 양철북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때쯤은 내 정신도 현실에 집착을 하기보다는 한 발을 빼고 현실을 관조하는 태도와 어쩔 수 없이 각박하게 부딫혀야 하는  현실이 서로 충돌하는 경지쯤에는 왔던것 같다. 남보다 덜 떨어지기는 했지만 나이가 먹으니 달라지긴 하더이다........

양철북의 내용은 주인공이 육체적 성장이 멈춘 상태에서 어린이 취급을 받으며 어른들의 모순된 현실세계를 들여다본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식물인간이된 아버지의 병실에서 가족들이 별 말씀들을 다 나누고 있었는데 사실상 그 아버지는 정신은 온전하여 다 듣고 생각하고 있다는 상황을 비유하면 좋겠다.

귄터그라스가 32살에 쓴 책이라고 하는데 작가의 작품은 사실상 자신의 생각과 고뇌가 무게있게 담겨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많지 않은 나이에 자기세계와 현실의 부조화때문에 고생을 많이한 면도 느껴진다. 작가가 현명하다면 진실과 거짓된 현실세계의 부조화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말도 되겠다. 다음은 귄터그라스의 '거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는 시 한편이다.


히틀러 시절의 유태인에 대한 '죄'로 금기가 된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인 불문율을 깬 시다.과거사와는 별개의 문제로 세계평화와 인류애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다시 봐야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는듯 하다. 문제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오래전에 갖추어진 작가인 만큼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파격적이거나 본질적인' 시선을 갖춘 귄터그라스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본질을 보는 능력은 현실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알게 되고, 말을 하며, 현실을 바꿔놓게 마련이다.   

2012년 10월 5일 금요일

우리 옌벤에서는 이런 책을.......

아무 책이나 읽으면 안되던 시절 나를 포도청으로부터 봉변을 당하게 만든 책이 있었다. 20여년전 헌책방에서 철학책이라고 1000원을 주고 주워온 것이 연변 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책이었다. 책의 제목은 [이야기 속의 철학]

이솝 우화처럼 아름다운 삶의 지혜가 담겨있는듯 하지만 연변의 교포들에게 마르크시즘을 철학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책이었다. 우리집에 놀러온 친구의 눈이 이 책을 보자마자 반짝였고 얼마후 봉변을 당했다. 책 껍데기에 '연변인민출판사 간'이라고 버젓이 써 있는 것을 가져온 내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막걸리값이 없어서 자취방의 모든 책을 정리한 주사파 운동권놈 죄도 크다.

각주구검(刻舟句劍)을 통하여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이해시키는 구절이 참 인상적이었다.

각주구검의 우화는 형이상학적 견해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현대의 형이상학은 자산계급의 세계관으로서 그 목적은 자본주의를 '영원한 정의'의 제도라고 선전함으로써 무산계급혁명을 반대하는 데 있다. 형이상학과는 반대로 맑스주의 변증법은 자연 및 사회의 모든 사물은 고유의 법칙에 따라 영원히 운동하고 변한다고 가정한다.  

기계적 유물론자는 물체의 간단한 위치 이동만을 운동이라고 보는 만큼 보이지 않는 것은 운동하지 않는 물질이라고 본다. -중략- 맑스주의철학은 또 세계에는 절대적으로 영원히 정지하고 있는 사물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정지상태는 다만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서...........  

그래서 공산혁명이 정당하다는 이론이다. 1958년 모택동 집권당시에 출판이 되어 30년 동안 7차례의 중판을 거듭한 스태디 셀러이다. 이 책을 보면 철학적 사고가 어떻게 이념을 이끌고 있으며 이념은 또 철학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등소평이 맑스 이론을 배척할때도(정치에서는 유지하고 경제에서는 버렸다고 하지만 맑시즘은 본질적으로 경제이론이다.) 줄기차게  옌벤에서는 읽히고 있었다.

위의 철학이론대로라면 저자인 임창성씨는 맑스주의 철학조차도 버려질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학문이 현실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정치가 아직도 이념을 우려먹는 면접같은 상황은 되먹지 못한 인간의 품질에 책임을 두어야 할것 같다. 

2012년 10월 2일 화요일

쓰레기통속의 지도자 (Leader in trash can)

사람들의 감정이나 이해심은 참 중요하다. 자신에게 불리한 정책결정도 제대로 설득이 되었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면이 있는 것이 시민의 속성이다. 그렇지 못하고 정책결정을 파워게임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풍토를 스스로 일구어내는 것이 시민들의 힘이다.

편향된 이념적 마인드나 종교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과 논쟁을 하게 되면 해결점 보다는 앙금만 남게되는 이유는 감정적인 문제로만 종결되기 때문이다. 패배했건 승리했건 분명히 앙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시작은 장대했으되 끝이 미약한 이유는 이념적인 풍토의 비합리성이 정치인들 상호간이나 시민들간에 감정적인 앙금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정책결정은  미국의 정치학자 M. Cohen이 말하는 '조직화된 혼란상태'속에서 이루어진 것같다. 설득과 타협은 없다. 의사결정의 기회, 해결을 요하는 문제, 문제의 해결책, 참여자가 서로 다른 시간에 통속으로 들어와서 우연히 만날때 정책결정이 이루어지는 단기적이고 우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 바탕에는 이념이 자리잡고 있고, 종교까지 자리잡을뻔 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풍토가 없는 것은 국민을 통합시키는 면에 있어서나 국가의 장기적 미래를 예측해볼때  비관적이다. 정치지도자에게도 비관적이다. 그러면서도 당장은 집권에 유리한 면이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