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필연적으로 보수적 심정을 갖게 된다. 그것이 정치성향으로도 나타난다.
애석하게도 연령층이 높을 수록 복지가 필요하지만 편안함만 추구하는 인간속성이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복지에 대한 왜곡된 심정을 갖고 있는 보수적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불합리성도 보여준다. 나이를 먹으면 그저 변화가 두려운 것이다. 젊은이는 복지여건이 갖추어져도 활력을 얻기 위해서 움직일려고
한다. '성과'를 목적으로 삼아 그저 움직이는게 좋은 것이다. 만약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부여하지 않고 복지만 제공한다면 어느 운동장 구석에서
하루 종일 농구공이나 축구공을 가지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젊은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경제 심리학자 댄 에리얼리(Dan Ariely)는
청년시절에 온 몸에 화상을 입고서 누워있으면서 장 폴이란 앵무새를 키웠는데, 그 앵무새는 수고가 필요한 먹이 상자속의 먹이만 구하더라는 경험을
말한다. 동물도 지적인 활동을 좋아한다는 증명을 해봤다는 것이다.
한국 노인분들이 과거 어렵고 권위주의적인 사회문화속에서 지나치게 타성적으로 살아온 결과
항상 '편안함'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무위의 삶을 이상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항상 고난의 연속이었고, 갈등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일터에 와보니 일터의 근로시간이나 강도는 젊은이들 기준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던것 같다. 몸과 마음의
능력에 비해 업무는 과도했고, 삶은 더욱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진보가 싫은 이유는 열악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켜온
노력조차 헛된 수고일수 있다는 두려움도 한 몫 한듯 하다.
어느 날 돈에 집착을 하는 지인이 말하길,노인분들이 싸우거나 성을 내는 이유는 경제적인
부족에 시달린 이유라고 말한다. 나는 빙그래 웃었다. "그건 네 마음이지" 아직도 노력없는 부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는 철없는 지인의
생각인것을 알고 있었다. 이념이나 종교, 아니면 삶의 목적이라는게 사람들을 무위의 세계를 넘어서 어두운 무덤의 평온함으로 인도한다면 아무도
그것들을 추구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통하여 '활력'을 얻고자 하는, 아니면 영생을 기대하며 더 오랫동안
활력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이념이나 종교로 유혹을 받은 것이다.
한 번은 노력에 비해 많은 복지를 얻어내고 있는 지인이 이제 막 노년기에 접어드는 자신의
신체사이클이 만든 순서대로 열렬히 보수정치를 지지하는 것을 보았다. 복지를 구하는 사람들을 적극 비판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복지가 필요없는 것은 네놈이다."
언젠가 버스를 운전할때 노인분들이 시비를 건적이 있었다. 그러면 져주고는 혼자서 중얼
거렸다. "오늘도 승리감으로 인한 활력으로 하루를 버티시겠군"
젊은이들이나 노인분들이나 끌려다니지 않는 여유로운 일자리가 필요하다. 복지란 그런
것이다. 경제적 분배 어쩌고 하는 사람은 좀 생각해봐야 한다. 여유롭고 활력이 있는 일자리를 통하여 삶을 진행해 나갈수 있는 여건이 최고의
복지다.
언젠가 몇 번 제의한 적이 있지만 단시간의 일자리를 통하여 노인 고용을 증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