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정부가 바뀌어서 내 자신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정부가 개선할려는 시도를 하자 '생각할 일거리'가 없어져서 잠시 머리가 허옇게 세는 황망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집중할 곳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인데, 한편으로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의미를 어렴풋이 인지하기도 한것 같다. "이제 우리 세상이다!'하고 외쳐봤자 그 영역
안에서 새로운 분열이 싹틀 수 있는 위험을 인간 본성속에서 얼핏 인지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현 정부의 정책이나 행태 중에서도 못마땅한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문제거리의 개혁을 시도할려고 했던 점은 비난할 수 없는 기본적 노력인듯 하다.
그동안 실용주의를 내세우면서 차라리 이념을 내세우는 것만도 못한 상황을 많이 보았는데,
철학이 없는 실용주의는 결국 이기적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이기적인 방향은 보수적 방향으로 가는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 같다. 강력한
목적이나 강력한 개혁시도가 몰입을 끌어내고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는 점은 개인과 마찬가지인듯 하다. 에디슨은 천재는 1퍼센트의 재능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99퍼센트의 노력과 몰입으로 만들어진 재능을 생각해볼때 천재는 100퍼센트의 재능 또는 100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은 왜 이념을 놓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몰입을 위한 수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통합과 발전을 위한 몰입의 수단으로서 이념을 만들어내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가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이념을 도입하면 구소련 붕괴이후의 러시아처럼 혼란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념은 '수단'에
그쳐야지 '목적'의 위상을 가지면 안된다. 목적을 인민의 자유와 행복에 두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한 번은 어떤 종교단체들이(한 두개가 아니다. 대체로 팽창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서양발
종교가 그런데)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난다. 그 세상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분열과 투쟁이 싹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물론 역사는 그래왔다. 원래 그런 세상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고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아우성치는 과정에 편승했던 개인들의
단기간의 흥분,노력, 승리의 쾌감들이 중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화한 세상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위한 노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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