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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1일 화요일

에르도안과 국민교육현장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정치행보와 터키국민들의 반응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에르도안과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독재, 푸틴의 장기집권등의 행보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만큼 터키인의 반응도 한국의 촛불집회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보통신의 발달한 이유로 반응이 좀 빨리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데 쿠데타의 위기를 SNS를 이용하여 진압한, 나름 세련된 에르도안도 외부에서 누구나 예측가능한 민주화 시위와 그에 따른 혼란은 예측을 하지 못한것 같다. 가진 자의 흐린 판단력을 보여주는듯 하다.

100만명은 중요하다. 보수는 가진자와 매우 못가진자로 진영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하다. 희망과 꿈이 없으면 최소한의 것을 지키거나 강자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처세술로 보수진영에 서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유추해보건데 100만명은 살팍하게 흔들리는 다수를 수용함으로써 곧 1000만명으로 불어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정말 협동을 원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소수의 천재가 이끌어가고 다수는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발상이 무섭기만 하다. 결국 경쟁력의 원천은 천재성에 기반을 둔다는 생각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극단적인 혼란의 산물이다.

- 후쿠다 세이지의 [INNOVATION OF FINLAND EDUCATION] 중에서 -

한번은 몇몇 사람에게 끊임없이 기운을 북돋아 줄려고 노력하다가 의지하는 마음과 얄팍한 이익을 취할려는 마음으로 살며시 편승해 오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자율적인 노력을 소홀히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적 권력이나 종교적 믿음에 쉽게 의존하는 경우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 나약한 대중은 강한 편에 서거나 강할 가능성이 확실한 편에 선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대중의 저항열기마저도 그렇게 반가운 일은 못되는듯 하다. 자율적인 교육이 바탕이 되지 않는 사회구성원들은 끊임없이 강해보이는 편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협동심을 비롯한 철학적 교육은 중요하다. 터키는 종교가, 한국은 이념이 교육철학의 발전을 억압했고, 결과는 수직적 권력사회와 권력에 대한 욕망, 심지어는 파도처럼 저항하는 기세까지 낳았을 것 같다.

한국의 촛불 시위는 이성적이고 조용한 저항이었기 때문에 더욱 존경받고 터키의 비폭력 무저항 시위도 발전된 국민의식을 보여주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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