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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2일 토요일

트럼프와 미국 정보기관의 불협화음


정치적 지위를 얻고자 하거나 상업행위를 할려면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적이 있다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이 더 들어간다고 한다. 미국의 트럼프대통령과 정보기관들이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다. 한 편으로는 이런 불협화음은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러시아 정보부가 의도한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할 만하다. 우연히 이루어진 것과 의도하여 이루어진 것의 차이를 생각하면 의도하여 이루어졌을때 조직이나 개인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듯 하다. KGB출신인 푸틴대통령과 러시아정보국의 '의견일치'는 쉽게 추측할 수 있지만 사업가출신 트럼프대통령과 미국정보부의 '불협화음'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인것 같다.

트럼프는 경제인출신답게 국가이념이나 도덕에 대해 둔감하고, 직관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않을까 하는 추측도 된다. 사업가의 직관과 정치인의 직관을 명분으로 미국정보기관을 관료주의적 기질이 있는 답답한 기관으로 무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각국의 정보기관들은 국가이념이나 국가적 도덕관념은 중요하고, 철저하게 지키는 면이 있다. 정보활동이라는, 경계가 모호한 행위가운데 정체성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개인과 조직의 수호자로서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국가이념과 도덕인듯 하다. 한국이나 북한의 정보기관들의 이념문제에 관해서 많은 언급을 했지만 이념을 핑계삼아 국민에게 등을 돌린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 같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그 자유주의란 특성때문에 자유주의 국가 정보기관의 활동력이 권위주의 국가의 정보기관에게 밀린다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유주의 국가의 정보기관들은 많은 내우외환을 겪으면서도 자유스러움을 무기삼아 목적으로 수렴하는 특징이 있는듯 하다. 


언젠가 처칠과 같은 정치인은 정보기관을 믿지 않고 스스로 직관적 결정을 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처칠의 직관은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지않는 정보기관의 보고라도 '생각의 근거'로서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부터 논의되지 않은 것들은 아무 관심도 받지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권위주의 국가의 정보기관들, 특히 북한같은 폐쇄적 국가의 정보기관들은 자연스러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암살과 같은 무력에 의존하는 성향이 있는 듯 하다.

좀 오래된 냉전 시대의 모습이지만 자유주의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의 정보기관의 결정절차를 비교할 수 있는 내용인데, 미국 정보기관은 대통령과는 독립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때로는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속을 썩이는 존재'가 될 수 있음도 알 수 있다. 물론 반대로 대통령에게도 정보기관이 정치활동에 속을 썩이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선의적인 국가이념이 강력한 쪽이 옳다는 것이다.

소련 체제에서는 요구를 설정하는 권리를 정부 최고 수뇌부에 자리잡은 소수 지도자들만이 갖고 있다. 미국 체제가 지닌 장점 가운데 하나는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설령 계급이 낮더라도 정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일리가 있으면 상부기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데 있다.  


미국의 국가 첩보예측(NIE) 작성과정
 
1.대통령 또는 국가안보문제 보좌관, 또는 CIA국장이 요구를 제출한다.
2.중앙첩보실 장관이 요구를 종합하여 수집기관(CIA,DIA,NSA )에게 작업을 넘긴다.
3.첩보기관은 데이터를 수집,분석하여 국가첩보예측의 원안을 작성한다.
4.국가 외국첩보위원회가 원안을 심사하여 최종적으로 국가첩보예측안을 작성한다.
5.다시 1번으로 피드백시킨다.


- 윌리엄 V. 케네디 [THE INTELLIGENCE WARFARE] 중에서 - 

개선을 위하여 / 끝이 없는 길

요즘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정부가 바뀌어서 내 자신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정부가 개선할려는 시도를 하자 '생각할 일거리'가 없어져서 잠시 머리가 허옇게 세는 황망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집중할 곳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인데, 한편으로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의미를 어렴풋이 인지하기도 한것 같다. "이제 우리 세상이다!'하고 외쳐봤자 그 영역 안에서 새로운 분열이 싹틀 수 있는 위험을 인간 본성속에서 얼핏 인지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현 정부의 정책이나 행태 중에서도 못마땅한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문제거리의 개혁을 시도할려고 했던 점은 비난할 수 없는 기본적 노력인듯 하다.

그동안 실용주의를 내세우면서 차라리 이념을 내세우는 것만도 못한 상황을 많이 보았는데, 철학이 없는 실용주의는 결국 이기적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이기적인 방향은 보수적 방향으로 가는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 같다. 강력한 목적이나 강력한 개혁시도가 몰입을 끌어내고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는 점은 개인과 마찬가지인듯 하다. 에디슨은 천재는 1퍼센트의 재능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99퍼센트의 노력과 몰입으로 만들어진 재능을 생각해볼때 천재는 100퍼센트의 재능 또는 100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은 왜 이념을 놓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몰입을 위한 수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통합과 발전을 위한 몰입의 수단으로서 이념을 만들어내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가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이념을 도입하면 구소련 붕괴이후의 러시아처럼 혼란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념은 '수단'에 그쳐야지 '목적'의 위상을 가지면 안된다. 목적을 인민의 자유와 행복에 두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한 번은 어떤 종교단체들이(한 두개가 아니다. 대체로 팽창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서양발 종교가 그런데)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난다. 그 세상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분열과 투쟁이 싹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물론 역사는 그래왔다. 원래 그런 세상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고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아우성치는 과정에 편승했던 개인들의 단기간의 흥분,노력, 승리의 쾌감들이 중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화한 세상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위한 노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7년 7월 19일 수요일

핀란드의 젊은 두뇌 유출과 복지문제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8/2017071803627.html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현상은 다르게 보일 수가 있다. 몇일전 인터넷 신문기사에 핀란드의 인재유출이 복지지출이 지나쳐 연구보조금등이 삭감된데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과연 복지지출의 증대와  연구보조금등의 삭감은 밀접한 상관관계와 연계성을 띄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몇년전 핀란드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인구 550만도 안되는 나라에서 노키아같은 거대재벌이 탄생할 수 있었던 점, 노키아가 무너져도 핀란드는 별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 핀란드의 탄탄한 경제시스템을 표현하고 있었고, 우수한 핀란드 인재가 많이 양성 되었다는 점, 공리적인 국민교육방식과  국가운영시스템은 많은 국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많은 국가들의 우파적인 관점으로는 복지지출이 많은 국가라서 좌파적인 국가로 여겨지는 문제도 있었던것 같다. 복지지출에 관한 문제는 핀란드가 어떤 '약점'을 보이게 되면 그 약점의 원인으로서 가장 먼저 거론될거라는 예상은 했다. 핀란드의 복지는 복지 자체보다도 지나친 경쟁과 분열로 국민과 국가를 파탄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개선할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복지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국가시스템의 항구적 발전과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국민수준을 달성하자는 목적에 대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얼마전 한국의 경주보문 관광단지와 포항울산 공업단지등을 장기간 돌아본 적이 있었는데, 조선산업등 국가기간산업의 불경기와 관광산업의 불경기가 밀접한 현상을 보여줌을 체감한듯 하다. 산업단지 불이 꺼지면 관광단지의 불도 꺼져 있음을 실감했는데, 전체적인 활력의 범위내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복지는 국민의 삶과 능력에 활력을 주는 문제로서 분배의 문제보다 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문제인듯 하다.

애초부터 인구 550만의 국가에서 주변국가에서 유치하고 싶은 인재를 양성해 냈다는 것 자체가 핀란드 교육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고, 타인보다 우월하거나 편안한 삶을 살도록 가르친 한국교육에서는 절대 발생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교육시켜놓고 국가규모나 내수(內需 / domestic consumption)의 부족으로 훌륭하게 양성한 젊은 인재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있어서 한계에 부딪힌 핀란드의 고민을, 핀란드가 지금의 수준까지 이르게 만든 복지정책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될 것 같다.

인재를 국내에서 소화할 수 있던지 유출하든지 일단 우수한 인재는 양성하고 볼일이다. 중국의 경제와 과학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장기적인 인재 양성의 프로젝트에 힘입은 바 크고, 일본이나 한국의 성장동력이 일찍 멈추게 된 이유는 다방면의 인재를 키우지 못하고, 정치와 경제가 집권화되어 있고, 수직관계 지향적이며, 출세지향적인 분위기에 힘 입은 바가 있다. 복지수준이 미약한 이유로 안정된 삶을 위해서 공무원시험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대다수인 국가에서 유출할 인재가 있을리도 없지만 핀란드의 진정한 고민과는 다르게 복지탓을 하고 있는 한국의 기사분석은 최선을 다했던 핀란드정책가들에게는 전혀 참조할 가치가 없어 보일 것 같다.

2017년 7월 15일 토요일

출세와 대통령기념관

남부지방을 지나가다 대통령의 생가라는 간판이 보여서 시골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기념관이 있었다. 존경의 여부를 불문하고 대통령기념관이라는 것은 과거 출세주의 전통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당 대통령을 반대하는 국민이 절반에 가까운 이념국가인 한국에서 대통령기념관이 온전한 정서로 다시 찾아올 장소가 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많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대통령기념관의 자판기 커피는 회전률과 유통기한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마시기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그만큼 방문객이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이 걸어온 자취가 기념관 내외부와 팜플렛에 서술되어 있었다. 한국구세대의 의식속에 뿌리깊게 잠재해 있는 출세주의가 서술되어 있었다. 전통과 충절의 고장에서 어려운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내고 적절히 공부 잘하고, 적절히 민주화 운동을 했으며, 샐러리맨으로 입사하여 대기업의 사장까지 승진하는 샐러리맨의 신화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런 문제까지 찐득거리며 비난할 건 못되지만 이념문제에 대한 오해로 해당 대통령과 그 당시의 정보기관 그리고 배후세력의 삼위일체적인 찐득거림에 세월을 낭비한 전력이 있는 몸으로써 유머스러운 보복을 취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 자신에게 다분히 있는듯 하다.


언젠가 밝혔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습관이 되어있는 기업가가 국가의 경영을 맡는 문제는 사익(私益 / a private profit)과 공익(公益 , 共益 / a public profit)의 경계를 모호하게 여길수 있는 상황으로 악화될 여지가 있는듯 하다. 집중력이 대단하지 않은 바에야 피치못할 일로 생각이 되기도 한다.

출세주의나 수직적권력관계는 왜 문제가 될까.

의외로 많은 경영자들이 자기 자신의 역할을 하부조직에서 올라오는 아이디어들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회사 전체 분위기를 무기력한 상황으로 몰고간다. 그런 상황은 다음의 시가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 시는 어느 날 런던 유니레버(Unlever)사의 게시판에 누군가가 핀으로 꽂아놓은 것이다.

이 나무를 따라
저 아래 뿌리에서부터 최고층의 왕좌까지
아이디어들이 넘쳐 올라가지만
내려오는 것은 "안 된다" 소리뿐

- Peter F.Drucker on innovation -

자신이 가진 재능과 결정력을 공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 한국 구세대인듯 하다. 상승욕구만 있는데, 목적에 부합하는 온전하고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질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관료출신이나 계급집단내에서 일하는 지인들과 대화를 해보면 계급주의를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은 계급의 잣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많이 포착하곤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계급주의를 경멸하면서도 높은 계급을 지향하는 내면이 포착되는데, 결국 자신이 계급이 낮은 것이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을 겪고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가 아닌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 어려운 시절을 겪었어야 했다. 

2017년 7월 11일 화요일

에르도안과 국민교육현장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정치행보와 터키국민들의 반응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에르도안과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독재, 푸틴의 장기집권등의 행보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만큼 터키인의 반응도 한국의 촛불집회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보통신의 발달한 이유로 반응이 좀 빨리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데 쿠데타의 위기를 SNS를 이용하여 진압한, 나름 세련된 에르도안도 외부에서 누구나 예측가능한 민주화 시위와 그에 따른 혼란은 예측을 하지 못한것 같다. 가진 자의 흐린 판단력을 보여주는듯 하다.

100만명은 중요하다. 보수는 가진자와 매우 못가진자로 진영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하다. 희망과 꿈이 없으면 최소한의 것을 지키거나 강자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처세술로 보수진영에 서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유추해보건데 100만명은 살팍하게 흔들리는 다수를 수용함으로써 곧 1000만명으로 불어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정말 협동을 원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소수의 천재가 이끌어가고 다수는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발상이 무섭기만 하다. 결국 경쟁력의 원천은 천재성에 기반을 둔다는 생각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극단적인 혼란의 산물이다.

- 후쿠다 세이지의 [INNOVATION OF FINLAND EDUCATION] 중에서 -

한번은 몇몇 사람에게 끊임없이 기운을 북돋아 줄려고 노력하다가 의지하는 마음과 얄팍한 이익을 취할려는 마음으로 살며시 편승해 오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자율적인 노력을 소홀히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적 권력이나 종교적 믿음에 쉽게 의존하는 경우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 나약한 대중은 강한 편에 서거나 강할 가능성이 확실한 편에 선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대중의 저항열기마저도 그렇게 반가운 일은 못되는듯 하다. 자율적인 교육이 바탕이 되지 않는 사회구성원들은 끊임없이 강해보이는 편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협동심을 비롯한 철학적 교육은 중요하다. 터키는 종교가, 한국은 이념이 교육철학의 발전을 억압했고, 결과는 수직적 권력사회와 권력에 대한 욕망, 심지어는 파도처럼 저항하는 기세까지 낳았을 것 같다.

한국의 촛불 시위는 이성적이고 조용한 저항이었기 때문에 더욱 존경받고 터키의 비폭력 무저항 시위도 발전된 국민의식을 보여주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