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업체에 입사원서를 내놓고 대표이사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대표이사의 권위적인 모습과 마음의 여유정도를 내쪽에서 살펴보는 경우가 있었다. 한 번은 회사에 인터뷰를 간다고 연락을 하고는 회사 정문에 도착하니 넓은 마당 한쪽 끝에서 노인분이 열심히 마당을 쓸고 있었다. 공손하게 이것 저것 여쭙고 사무실에 들어가니 잠시후 대표가 왔는데, 그 노인분이었다. 나를 시험에 들게한 주체의 쏟아지는 질문에 감정의 변화도 없이 의연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의 크기에 비해서 대표의 심리는 매우 '개인적'이었다. 나는 일을 원했지 나를 다스릴 '제왕'을 원했던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터뷰는 실패했다. 몇번 그런일이 있고나서는 회사의 '높은 사람'과 맞닥뜨릴일이 없는 상대적으로 빈한한 일자리를 찾아서 일했는데, 마음이 편했다.
아직도 모택동을 숭배하는 중국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중국인들이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빠져있고, 제왕적 권위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로 받아들일 민주적인 자세가 안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경제민주화에 정치민주화가 따를 수 없는 중국의 한계를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 북한은 과도기적인 정치형태로 중국의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은 맞지만 중국 그 자체는 한계에 부딪힐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공산당의 지나친 권위는 협동과 화합을 끌어낼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든것이고 액튼경(Acton)의 말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진리를 낳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중국은 부패문제가 심각한데, 정치적인 참여를 할 수 없는 에너지는 경제적인 상승욕구로 과잉배출되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훌륭한 국가를 건설할 꿈과 희망은 많은 능력있는 이들의 마음속에 싹틀 수 없는 여건상 대단히 개인적이고 일탈적인 꿈을 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엘리트들의 비리도 알고보면 상승욕구나 협동적인 참여욕구를 차단당했다는 자기기만이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념과는 상관없이 대장정의 가혹한 시련을 벗어났음에 대해서 중국홍군의 끈질긴 생명력은 경이롭게 생각하지만 모택동에 대해서는 대단히 좋아하지 않았다. 봉건적이고 부패한 중국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을 일으킨 지도자가 또 다른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 '왕조의 교체'이상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은래와 등소평같은 혁명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또 다른 세습왕조의 탄생이라는 역사적인 오명을 벗어나지 못할뻔 했던 것이 중국혁명인듯 하다. 중국의 근대화보다는 계급의식이 중심이 된 이념으로 또 다른 제왕적인 권위를 갖고자 했던 모택동은 독서를 즐겼지만 중국 고전에 치우쳐 읽음으로서 봉건적인 제왕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그림속에 그려넣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1974년 2월 등소평은 뻬이징으로 소환되었다. 모택동의 시대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지독했던 문화대혁명도 끝났다. 파괴는 전쟁보다 더 지독한 상처를 남겼다.산업은 절름발이가 되었고 교육은 사라졌으며 당은 난파선이 되어 있었다. 유소기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모택동의 건강도 아주 나빠서 정신 상태조차 매우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모택동의 아내인 강청과 사인방의 세 추종자들은 잠시 충격을 받았으나 곧 반격태세를 갖췄다. 주은래는 암에 걸려 있었다.
모택동은 다시 이 부도옹에게 도움을 청했다. 모택동은 유소기에게 했던 것처럼 등소평도 녹초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아니면 하룡의 경우처럼 의사를 시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등소평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는 등소평을 불러들였고,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등소평 은 아주 드믄 인재다. 그에게는 사상이 있다. 그는 무턱대고 문제에 달라붙지 않는다. 그는 해결책을 찾는다. 책임감을 갖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모택동의 말에 따르면 등소평은 훌륭한 전사였다. 그는 소련과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등소평같은 사람은 좀처럼 찾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 HARRISON E. SALISBURY [THE LONG MARCH] -
그러니까 모택동 자신은 이념과 제왕적 권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등소평의 목적을 아는 태도는 인정하고 또 필요로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지하고 있는 사람을 숙청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택동은 등소평을 '솜뭉치속의 바늘'이라고 평했다. 부드러움속에 감추어진 목적을 향한 일관된 통찰력이 깃들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은 최근에 김용진 내각부총리를 처형하기까지 4년간 100여명을 처형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은 위원장의 집권초기에 경제대국화의 포부를 피력했던 이상과는 달리 문제는 개선이 안되고 있는데, 이념과 군사교육외에는 배운게 없는 북한 엘리트들에 대한 신뢰할 수 없는 마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정은은 2009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실시된 생산배가 운동 '150일 전투'를 비롯하여 같은 해 연말의 통화 단위 변경, 2011년의 경제개혁인 '6.28 조치'까지 다양한 경제정책을 펼쳐왔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조선인민군 보수파 중진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기를 거듭했다.
- 일본 동아시아연구가 곤도다이스케 -
거칠게 표현하면 배운것도 없고 생각도 없는 쓸모없는 인물들이 김정은 위원장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억한 심정까지 생기게 만든 것이다. 생각해보면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시대까지 엘리트들의 교육을 소홀히 한 나쁜 효과를 김정은 위원장이 떠맡게 된 결과가 된 것같다. 몇 번 서술한 바 있지만 효과가 늦지만 확실하게 나타나는 교육정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사태인듯 하다. 프랑스의 르노자동차 공장에서 작은 체구로 육체노동을 하면서까지 배움의 열정에 빠져들었던 등소평과 같은 참모가 없는 것이 김정은위원장의 큰 고민인 것 같다. 개방이나 개혁을 할려니 일을 할 인재가 없고, 이념과 체제, 선군정치에 몰입한 엘리트들이 체제를 받쳐주는 인재들이자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인재들이기도 한 이중적인 성격을 감당할 수 없는듯 하다.
몇년전 한 번 언급한 바 있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고문정치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국혁명기에는 국민당쪽이나 공산당쪽에서 많은 서양인 군사적 정치적 고문들이 있었는데, 정작 고문들의 생각이 그릇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여도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로서의 다양한 지식과 반대의견을 유발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논의의 다양성'을 유발할 인재라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