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꽤 오랫동안 낮시간을 이용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젊은 이들에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라고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내가 도덕성있는 인간이 아니라도 의사의 활동처럼 기호의 힘을 빌어서 좋은 이야기를 해본것 같다. 낮시간의 일은 대단히 '야성적인' 이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좋게 표현하니 야성이지 자신을 억제해 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아 온 후유증을 일관성있게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노폭(老爆)의 경지까지 오른 노인분도 있었고, ADHD의 증상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학력은 천차만별이었지만 공통된 특징은 하고 싶은 행동이나 말을 억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어떤 연배있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그 사람의 과거의 행적이나 직업등을 대충 유추할 수 있는데, 책임감이 필요하고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한 사람은 말이 적거나 절제되어 있는 성향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일을 했으면서도 언행이 절제가 안되는 사람은 일터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박수 안 칠때 떠난 사람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모든 교육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이성과 도덕성의 함양'인듯 하다. 소크라테스는 "용기 있는 자가 선하면, 그는 또한 현명하다."라고 말하고 제자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지향하는 교육을 주장하고 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이나 훈련을 통해서 선하고 도덕적인 존재로 훈련을 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서 좀 더 실천적인(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철학에 비해서) 스콜라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나 교부철학자인 아우수스티누스는 인간 지성과 행위를 신앙에 통일되게 묶어 놓음으로써 도덕적인 함양을 추구하였는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좀 더 이성과 절제의 노력이 필요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에라스무스는 인본주의를 중시하는 르네상스교육학자로서 신과 관련해서 보다는 쓸모없는 피조물(인간세상에서)이 되지 않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나 캘빈도 중세크리스트교의 도덕적인 문제점을 보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신교를 확립한 목적만큼 교육에 있어서 도덕적인 실천을 중시하였는데, 루터는 엘리트 중심의 교육이 아닌 평범한 국민들 모두를 대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추구할 것을 제시했다. 중세 크리스트교의 부패로 개신교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구교인 카톨릭도 개혁을 추구했는데, 로욜라가 창립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더욱 도덕적인 카톨릭으로 개혁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이런 노력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예수회의 교육은 인간공동체내에서 타인에게 봉사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쳤다.
사회계약론자인 로크는 학교교육을 대단히 비판하여 사회지배층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고 가정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요즘도 학교교육을 비판하는 문제에 있어서 좌파나 우파의 개념이 개입되는 사실을 보며 제도권의 교육이라는 것이 사회계층이나 사회계급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원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듯 하다. 로크가 가정교육을 중시한 것은 부모의 원초적인 사랑이 개입하는 점, 당시 상류층의 삶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산만한 점등을 들고 있었다. 프랑케는 '습관'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습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었고, 프랑케의 말처럼 훈계와 교훈이 습관으로 익어야 교육이 성공적인 것은 당연한듯 싶다. 로크와 마찬가지로 사회계약론자인 루소에 대해서는 저번에도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루소 자신이 독학을 하여 사상적인 세계를 구축한 만큼 자연중심적인 교육이나 대안교육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루소와 동시대의 사람인 꽁도세는 인간권이나 시민권을 이야기 하며 교육이 더욱 넓은 공동체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시몬느베이유나 그녀의 철학적인 스승인 알랭에 관해서 생각하다가 프랑스에서는 노동운동이나 다른 여러 방면에서 철학적인 관점과 기반이 튼튼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철학도 자칫하면 좌파와 우파의 이념개념으로 몰려버리는 한국의 빈한한 철학교육에 대해서 통감을 한 적이 있었다. 하물며 18세기에 사회계약론자들이나 꽁도세가 시민권을 넘어서 인간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후진적인 교육철학이 정치적인 후진성에 크게 반영되고 있는 것은 크게 생각해볼 문제가 있는듯 하다.
엄격한 의무론자인 칸트는 교육은 다양한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조화롭게 계발시켜 인간성의 완성을 접근하도록 돕는 것을 일차적 과제로 삼는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준다던가 타인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데, 칸트나 고대그리스의 소크라테스계열의 철학자들은 절대적인 윤리성을 지향하는 절대론적인 철학자여서 교육에 대해서 엄격한 점이 있지만 상대론자인 다른 계열의 철학자들, 예를들면 공리주의자들과 같은 철학자들도 사회구성과 유지를 위한 규범으로써 교육을 중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교육의 궁극적인 방법이나 목적은 자기억제와 관련이 되어 있는듯 한데, 각자의 의무와 책임을 다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만약 사회구성원들이 선동이나 대중조작에 취약하다던가 산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사회교육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병리현상을 보이는 사람을 만날때면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듯 하다. 특히 권력지향적이거나 계층적인 상승욕구나 계급적인 구분욕구(계급은 계층이라는 개념에 비해서 더욱 경제적인 모습을 띄는 마르크스적인 개념이다)에 민감한 사회는 부실한 교육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