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을 비롯한 한국의 법조인들이 보수성을 띄게 되는 이유는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 공부에 초인적인 집중을 해서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대학 시절과 졸업 후 몇 년을 초인적인 집중을 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인재들이 인생의 찬란한 시절을 지엽적으로 보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고독하고 험난한 수험생활에서 종교적인 접촉을 하는 인재들은 종교에 많이 의지하게 되고 훗날 사회적인 지위를 얻고 나서도 자신의 종교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종교는 특성이 보수적이다. 종교적 사고는 과거의 일에서 시작한다. 과거의 성인이 등장하고, 과거의 국가가 등장하고, 과거의 왕이 등장하고 과거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경전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종교는 새로운 질서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낙인찍기 쉽다.
때로는 종교집단은 위와 같은 방법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은 사람들을 포섭하여 성직자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의무인 도덕성보다는 ‘사회적 세력 싸움’에 몰두하게 된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공격적인 선교를 통하여 그런 역할을 많이 한다. 나도 6년을 개신교회에 다녀봐서 안다.
종교는 성격상 내적 응집력이 강하다. 법을 공부한 사람들의 세계도 내적 응집력이 강한 특성이 있다. 종교와 법의 세계가 결합되면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돌던지, 세상도 넓고 할 일은 엄청 많다든지 뭐 그런 것을 잘 모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10대에 너무 많은 책을 읽었다. 앙드레 모로아의 [프랑스사], 등소평 평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헤밍웨이, 이순신 평전, 앙드레 지드, 시몬느 베이유, 김홍섭 평전, 미야모토 무사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세르반테스, 리차드 바크, 왕과 나,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법서 한 권과 종교 경전 한 권을 매섭게 들고 팠으면 나도 전문가가 되어 대접받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뭔가 믿고 싶어도 철학적 통찰력이 개입하여 애를 먹었다. 한 번은 SNS상으로 사기꾼이 접근한 적이 있는데, 가능한 멍청한 모습을 보여줬다. 오죽 삶에 무료함을 느꼈으면 자신을 던져가며 놀고 앉아 있었다. 20대에 종교인들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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