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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9일 토요일

평등사회의 힘/토크빌(Tocqueville)

종종 노후 대비를 위해서 특허관련 시험준비를 한다. 시험이 쉽지않고 자연계방향의 기술 과학 과목이 많아서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많이 보는 입장에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영어공부겸 경제학 영문원서를 함께 읽곤 하는데, 주로 평등한 민주사회지향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인문 사회과학공부와는 달리 계급적 승부에 몰두하는 시험공부는 진지하게 장기화되면 인성(人性/ human nature)관리 축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음을 느꼈다. 어찌보면 과거 한국의 출세의 등용문이었던 '고시공부'의 부작용을 보여주는 인물이 많았던것도 무리가 아닌듯 하다. 그 사람들도 잘못된 교육 방식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어느 날 공부법에 관한 책을 수십권을 샀다. 서구유럽에서 출판된 공부법에 관한 책과 일본에서 출판된 공부법에 관한 책은 무척 달랐다. 일본책의 공부법은 아직도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반자이돌격을 외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합리적인 사고 보다는 극의(克意/ extreme will)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반복학습을 필요로 한다. 그런 공부방법을 탈피하지 못하는 일본의 교육이 시민적 평등사회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나마 내 자신은 기술 과학 관련 공부를 하거나 경제학 공부를 하면서 인문 사회과학이나 법공부가 잘못 인도할 수 있는 길인 아집과 극단성의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음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인 토크빌(Alexis de Tocquevilie1805-1859)은 유명한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사회 내 구성원들간에는 계급의식이 전혀 없고 계급 의식속에 내면화된 남보다 낮아서 수치스러운 감정같은 것이 사회적으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미국은 분권화와 민주주의를 달성했다고 말한다.  토크빌이 생존해 있을 당시는 미국이 흑인 노예와 인디언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을 무렵인데도 토크빌은 백인들만의 미국사회는 중산층 중심의 시민적 평등사회로 생각했다. 어쩌면 노예해방과 같은 사건은 그런 평등 사상이 바탕이 되었음도 생각한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란 책을 읽고 평등주의로 개종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동북아시아 사회는 남보다 더 나아져서 남을 아래에 두기 위한 저급한 의지력을 발휘한다. 심지어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시도가 종교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천민자본주의, 극단적 종교이념들이 계급사회를 지향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자신들의 이상을 강요함으로써 합리적 사고를 파괴하고 시민들의 의식을 노예로 만든다. 그런 가운데 시민들의 창의적 사고가 억압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렸을때 부친에게 나를 늦게 낳아서 젊은 아버지를 갖지 못함을 탓했다. 그러자 부친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아버지가 56세에 낳아서 현명했으니 너도 현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한국인과 미국인에게는 전쟁범죄자로서 인식이 되지만 나름 아버지가 늦게 낳은 현명함이 일본인들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억압받아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경우가 되었다. 

Admiral Isoroku Yamamoto, Combined Fleet, which  included the main carrier force, had been considering the problem since early 1941. In principle he opposed making war on the United States, which he knew well as a former English-langage student at Harvard and naval attache in Washington; he did not believe that Japan's small industrial base could ever effectively support a war against the United States' vastly larger economy. His well-Known views had made him unpopular both with nationalist politicians and their supporters and within the armed forces; he had been sent to sea in 1939 largely to save him from assassination.

The threats were not hollow; in 1936, a group of super-nationalist army officers had killed several moderate politicians, including the finance minister and a former prime minister, occupied central Tokyo and been overcome only after three days of street fighting. Yamamoto undoubedly had reason on his side, as other naval officers saw. Confronted, however, by the reality of the - dominated government's determination to solve Japan's economic problems by aggressive measures, Yamamoto stifled his objections and proposed an alternative attack strategy. He suggested using the carrier force to destroy the American Pacific Fleet at its moorings in Pearl Harbor, Hawaii, its Central Pacific base.

주력 항공모함을 포함한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제독은 1941년 초부터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원칙적으로 미국에 대한 전쟁 도발을 반대했다. 그는 하버드에서 영어를 배우고 워싱턴에서 해군 무관을 지낸 적이 있었으므로 미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소규모 산업 기지가 미국의 방대한 대규모 경제에 맞서 전쟁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잘 알려진 자신의 이러한 견해 때문에 야마모토는 민족주의 정치인들 및 그 지지자들과 군 내부 모두에게서 인기를 상실하고 말았다. 

1939년 그는 암살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상으로 파견 되었다. 암살 위협은 괜한 염려가 아니었다. 1936년 극단적인 민족주의 계열의 한 육군 장교 집단이 재무장관과 전 수상을 포함한 온건파 정치인들 몇몇을 살해하고 도쿄 중심부를 점령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3일간의 시가전 끝에 겨우 진압되었다. 야마모토는 다른 해군 장교들이 본대로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 문제를 공격적인 조치를 통해서 해결하겠다는 육군 주도의 정부가 내린 결정에 맞서 야마모토는 자신의 반대 의사를 억누르고 대안적인 공격 전략을 제시했다. 그는 항공모함을 이용해서 미국의 중태평양 기지인 하와이의 진주만 항에 위치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키자는 안을 제시했다. 

- [INTELLIGENCE IN WAR] BY JOHN KEEGAN -


문화혁명의 극단적 선동정치의 폐단을 경험했던 등소평이 오랜 전통의 팽창적 중화주의와 선동정치가 결합하여 가장 큰 비중화외부세력인 미국과 섣부른 충돌을 할것을 세심하게 예언했을 것이다. 첩보전략의 관점으로 보면 미국은 여러 정보를 종합하여 이런 사태를 예측했고, 손해보지 않는 전략을 내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끔 일본은 아직도 극우주의 사상이나 민족주의 사상을 국난극복의 이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근본적으로 민주화가 덜 된 부작용이다. 미국이 강한 이유는 민주적 평등사회의 힘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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