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만 읽으며 두고 두고 봐야할 책들을 적어둔 목록이 꽤 되어서 사보고 싶었던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였다. 그 중에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가 지은 [21세기 자본]도 있었다.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이 돈을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해진다는 피케티의 이론은 실생활에서 너무 생생하게 느끼는 문제였다.
심지어는 위의 문제를 생생하게 느껴보기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노동현장을 경험하고는 그 조악함에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으며 그때마다 나에게 남겨줄'돈'을 벌지못한, 나아가서는 교육을 시켜주어 '비평적인 사고'를 키워준 부모님을 원망(?)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던것 같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시간이 지켜지지 않는것은 다반사고 더 나쁜것은 그 조악한 현장에서 인간의 탐욕과 관련된 살벌한 투쟁이 일어나는것도 다반사였는데, 특히 젊은 노동자들과 경쟁에서 이길수 없는 연령이 많은 근로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삶의 본질은 고통이라는 불교철학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때마다 하루 여섯시간 근로제나 주4일 근로제와 같은 탄력적인 근로시간이 활성화되면 체력적으로 열세인 노령의 근로자나 학업이나 미래에 대한 투자를 병행해야 하는 젊은이들을 외국인 노동자대신 근로현장에 흡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곤했다.
젊었을때 열심히 일했는데, 늙었을때도 열심히 일해야 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곳이 한국의 노동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면 피케티보다 훨씬 선험적으로 자본소득의 위력을 체험한 한국인들은 많았을것 같다. 물론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것은 이념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더 많은 실업자를 구제하거나 노동현장에 활력을 주어서 국부(國富)의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해석해야 할듯하다.
이미 피케티의 저서가 전세계에 뿌려지기시작할때부터 마르크스와 비교되는 충격적인 비난을 받기 시작했는데, 갈등론자인 마르크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문제의 치유'라는 균형론적인 관점으로 해석되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듯 하다. 내 자신이 조악한 노동현장에서 국가와 부모를 원망하는 시간 보다는 어떻게 이 문제를 개선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피케티의 생각도 그러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 즈음에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한국에서 천대를 받는 철학에 관한 사치스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쓴 피케티의 책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통계와 합리적인 논리로 풀어나가는 학문의 중요성은 인류가 모두 망하느냐 모두 생존하느냐 하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황당한 종말론적인 종교에 비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인듯 하다. 피케티의 연구와 같은 시도는 어떻게든 문제를 파악해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보자는 매우 긍정적이고 인간적인 노력, 현실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나는 종종 동양철학이나 동양사상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이념문제와 관련해서 토로해 온 글들이 서양철학이나 서양사상을 많이 인용해 오고 동양철학이나 동양사상에 대해서는 적대시 수준으로 인용을 기피해 온듯 하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는 동양적인 것을 많이 생각해온듯한 흔적이 보인다는 생각을 남의 글 읽고서 생각하듯이 생각하곤 하였다.
동양철학은 더욱 근본적인듯 하다.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과정의 합리성을 무시해 버리는 교조적이거나 종교적인 믿음으로 생각을 묶어버리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불교의 공(空)사상이나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심지어는 불교나 도가 보다도 한 단계 합리성이 업그레이드된 유교사상조차도 근본적인듯 하다. 근본적인 것들은 다른 생각들을 배제하기 쉬운듯 하다. 한 시대의 사상으로 자리 잡으면 다른 세상으로 갈 길을 열어주지 않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지금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광신적인 '이슬람 국가(IS)'의 광란도 더욱 근본적이라서 폐쇄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듯 하다. 개신교에서는 유교가 조선왕조의 폐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폐단은 달리 생각함을 막아버린데서 문제가 비롯되는듯 하다. 유교의 문제는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일치한다. 동양철학이나 종교의 문제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옳지만 명확하지 않은 문제가 중구난방으로 해석될 여지를 준다.'는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서양의 사상들이 인류문화를 발전시킨 이유는 WHY, 왜, 어째서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주기 때문인듯 하다. 변화와 발전은 끊임없는 의문과 해결책을 내놓는 '수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듯 하다. 이념이 종교화되면서 이런 '수고'를 막아버렸다.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내용이지만 피케티의 저서는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는다. 조악한 상황에 생각없이 분노하기 보다 천천히 현실을 탐구해나가고 교정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때문에 할 수 없이 33000원짜리 책을 사올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을 자유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국민에게 사상의 자유가 없으면 북한처럼 동토(冬土)의 왕국을 벗어날 수 없다. 학창시절 옌벤인민공사에서 출판된 철학책을 읽다가 포도청과 불협화음이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많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자유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