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첩보원학교인 나까노학교에 관한 넌픽션소설이 60년대에 일본에서 출판 되었는데 한국에서 번역본이 잠간 나왔다가 절판되어 어렵게 구한 끝에 김구선생에 관한 내용이 있어 올립니다. 호리라는 인물중심으로 씌어졌는데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봉창선생과 윤봉길선생의 의거도 나와 있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문치파(文治派)독립운동과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무단파(武斷派)독립운동의 갈등이 한반도 분단의 씨앗이 되었음도 잠깐 암시하고 있습니다. 신출귀몰했던 김구선생일행의 정보활동이나 일본인으로서 자각에 근거하여 행동하라는 핫도리의 지령등은 인상깊은 내용입니다.
워싱턴 군축 회의의 실패가 해군의 오오와다 통신대의 건설을 가져왔듯이, 육군도 나까노 학교 설립이 있기까지는, 첩보의 불비로 여러 번 실패를 했다. 중국어의 능숙함을 인정받고, 만주 건국후의 특무기관 요원으로 약속되면서, 헌병중사로 군적을 떠난 호리가 중앙과의 타협차 상경, 숙모가 경영하는 고이시가와의 하숙집에 묵게 된 것은 1932년 1월 9일이었다.
호리가 하숙집에 들어서는데 숙모가 한 손님을 배웅하고 있었다.그 얼굴을 본 순간 “어?”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틀림없이 6년 전, 조선 북방의 헌병대에 있을 때 본 얼굴인데......” 싶으면서도 분명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누구죠?” “와세다공과에 다니고 있는 하야시라는 하숙인 친구야. 하리라는 중국인인데, 지난 연말부터 묵었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거야.”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숙모의 말에 끌려 “중국인이라구? 중국인이라면 그 사람이 아니겠군” 하고, 그도 깊이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다음 하야시라는 학생이, 실은 한국인 최원영이며 하야시는 일본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국인 하리도 역시 한국인이 아닐까”하고 생각하다가 그는 “앗차”하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조선 흥남에서 검거하려다 놓쳐버린 조선독립운동가인 유원보라는 것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닷새가 지나 있었다. 만사는 뒤늦은 때였다. “8일 날의 사건을 신문에서 보면서도 그것과 연관시켜 생각지 못했으니 나도 이젠 둔해졌군” 호리는 씁스레 고소를 지었던 것이다.
1932년 1월 8일
그 날은 요요끼의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이 있었다. 이 관병식에 참석하러 가는 천황의 행렬이 사꾸라다몽 시전(市電)정류장에 다다른 것은 오후 1시45분. 이날의 행차는 제 3공식으로, 선두의 마차가 의전차장, 두 번째는 궁내대신, 천황은 세 번째의 마차에 타고 있었다. 이 두 번째의 마차가 정류장의 안전 지대에 이르렀을 때 폭탄을 던진 자가 있었다. 폭탄은 안전지대의 남단에서 약 1미터 남짓 떨어진 전차 궤도 내에서 터져, 궁내 대신이 탄 마차의 하부를 때렸다. 말이 하늘로 뛰어오르며 요동을 쳤으나 궁내 대신도 마차를 부리는 사람도 무사했다. 뒤따르던 근위 기병의 말이며, 천황기잡이의 근위 사관이 탄 말들도 이리저리 날뛰었는데, 파편으로 다리를 다친 말도 있고 콧등에 파편이 박힌 말(천황의 마차를 끌던 말)도 있었다.
검은 복장의 범인은 폭파현장으로부터 서북쪽 약 18미터, 경시청 정문앞의 군중 뒤에 서서 제 2탄을 던지려고 하는 것을 경관이 달려들어 체포했다. 조선 경서부 금정118번지 이봉창으로서 “조선 독립을 위하여 조국을 뺏은 일본의 천황을 죽이려고 했다. 두 번째의 마차가 검은 색이고, 창에 금색 술이 달린 국화분장의 붉은 천이 내려져 있어 천황의 마차라고 생각하고 던졌는데 실패했다. 분하다.”하고 두려움 없이 진술했던 것이다. (이 봉창은 그 해 9월30일, 대심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조사가 진행됩에 따라 이 봉창의 배후 관계도 알게 되었는데 숙모의 하숙에 묵고 있던 호리는 신문을 통해 사건을 알았을 뿐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물론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독립운동의 유 원보가 국적까지 위장하고 일본에 잠입, 사건이 있던 다음 날인 9일에 부랴부랴 귀국한 사실로 미루어 “수상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 봉창이 실패했을 경우에 암살 2진으로서 유원보가 도일했었거나, 아니면 암살의 사명을 받은 이 봉창의 거사확인 역으로 도일했었거나 그 두가지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최원형을 만나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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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합방 조약이 조인되어 한국을 조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10년이었다. 이 합방에 불만을 품은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미국에 매달려 국권을 회복하려 하는 문치파(文治派)와 소비에트의 힘으로 독립을 꾀하고자 하는 무단파(武斷派)가 있어서 남북 양단의 한국 비극의 불씨는 이미 이때부터 싹트고 있었는데, 그 독립을 원하는 조선사람이 일본의 경찰권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의 상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초대총리 이승만]의 간판을 간판을 내걸었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 때부터 프랑스조계는 독립운동자의 천국이 되었고, 후에는 소련 공산당도 극동 사무국을 두어, 말하자면 세계의 혁명가 소굴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932년은, 1월에 제 1차 상해 사변이 일어났고, 3월 1일에는 시라가와 대장이 상해 파견군 사령관으로 개입하여 3일 14시 일본군이 전투행위를 정지했기 때문에 일단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정식 정전협정이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평상시에도 무정부주의자거나 공산당원이 아니고선 일본인은 출입할 수 없던 프랑스 조계에, 그것도 바람이 센 그 때에 “방까지 빌리고 있는 핫도리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하고 호리는 미심쩍어 했다. 미심쩍은 걸로 말한다면, 바로 그 핫도리의 명령도 지나치게 간단해서, “당신 방에서 마주 보이는 벽돌집에는, 이또오 암살의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종전이 임박해서 살해되었다)이 살고 있는데, 불온 조선인의 소굴이다. 당신은 그 집을 감시, 정보를 얻어내어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에 근거하여 행동하도록, 나는 당신을 일본인으로서 신뢰한다. 정보도 자금도 필요에 응해 여자가 연락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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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가 안 공근의 집의 감시를 계속하고 있을 때, 같은 상해에서 이 집의 수사를 펴나가고 있는 일본인 일단이 있었다. 사꾸라다몽 폭탄사건의 이 봉창의 배후에는 김구가 있어서 천황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검사국은, 후루다, 가메야마 양 검사와 오가와 서기, 경시처의 야마가다, 와까바야시 양 특고 형사를 김구 체포를 위해 상해로 파견했던 것이다.그들도, 김구가 프랑스조계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공동조계뿐이었고 치외법권의 프랑스조계에서는 국제문제가 되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분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조계에서 나올때를 느긋하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또 다시 대 사건이 일어났다.
4월29일, 이날은 천장절(천황생일)이었으므로 일본측에서는, 제9, 제14, 양 사단에다 해군부대를 참가케 하여 상해 신공원에서 대 열병식을 거행했다. 시라가와 군사령관이 애마를 타고 열병을 마친 후, 관민 합동의 천장절 축하식이 있었기 때문에, 중도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도 수만관중은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오 무렵, 공원 광장의 단상에는, 무라이 총영사, 노무라 해군사령관, 우에다 9사단장, 시라가와 대장, 시게마쓰 공사, 도모노 민단장, 가와바따 행정위원장이 일렬로 늘어서서 축하식이 시작되었다. 국가제창의 제 1절이 끝나고 제 2절이 끝나려 할 때, 단상 좌후방에서 날아든 빨병이 시라가와 대장의 발께로 굴러왔다. 누가 장난을 쳤구나 생각하는 순간, 빨병 주둥이에서 연기가 일더니 엄청난 소리를 내며 터졌던 것이다.
시라가와 대장은 전신에 백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고 5월 26일 병참병원에서 죽고, 도모노 민단장도 죽었다. 시게미쓰 공사와 우에다 중장은 다리, 노무라 중장은 한 쪽 눈을 잃었는데, 범인인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날은 입장하는 사람의 복장검사를 헌병이 했는데도 윤이 맨, 폭탄이 장치된 빨병을 가려내지 못했던 것이다.체면이 땅에 떨어진 헌병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기를 쓰고 배후관계를 추궁한 탓에, 윤은 견디다 못해 김구의 이름을 뱉고 말았다.
호리가 이 사건을 안 것은 29일 오후였다. “역시”하면서 건너편의 감시를 엄중하게 하고 있는데, 그날 따라 저녁무렵부터 방문자가 끊기는게 아닌가. 보통 때는 밤에도 사람 출입이 있었는데 “이상한데”하고 한밤중까지 감시를 했지만 새벽 1시가 되어도 변화가 없기에 창에서 벗어나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데 그 주변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일본말의 “쏴라, 쏴”하는 외침이 길 쪽에서 들려와 호리는 튀어 일어났다.
그때, 조계의 정적을 찢으며 권총의 연사와 유리 깨지는 소리가 일었다. 이어서 아우성치는 일본말, 창으로 내다 본 밖의 광경에 호리도 놀라고 말았다. 어느 틈에 왔는지 길에 자동차가 수십대 늘어서 있고, 일본 헌병이며 영사관 경찰이, 권총으로 쳐부순 건너 편집의 2층 창에 사다리를 버티고 집안으로 넘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소동은 얼마간 계속되다가 가라앉았는데, 체면상으로라도 김구를 체포해야겠다고, 일본 헌병이며 영사관 경찰, 거기에 일본 검사국의 일대도 가담, 조계 경비의 안남인 순경의 제지를 밀어내고 프랑스 조계로 들어가 안 공근등을 덮쳤던 것이나 바람보다 빠른 정보망을 가진 그들은 그날 저녁 중국 오지로 달아나고 결국 일본 측에서는 소득없이 물러났다고 하는 정보를 호리가 들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