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는 초기에 왕정을 겪은 바 있다. 하지만 전제군주로서의 왕정이 아닌 고대의 족장적인 성격의 왕정이었던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곧 왕정이 쇠퇴하고 토지귀족의 권한이 강력해져서 왕을 포함한 9명의 행정집행관이 회의제형식의 정부형태로 통치를 하게된다. 이러한 정치형태는 귀족들의 강력한 계층지배에 공헌하는 결과가 되어 화폐경제는 발달하지만 채무노예가 급증하는 부작용을 낳아 아테네의 미래를 어둡게 하였다.
이때 솔론이 등장하여(기원전594년) 고리채를 정리하여 채무노예를 금하고 빈자(貧者)에게 억압적인 드라콘의 형법을 폐지하였으며 귀족과 평민의 입장을 절충하여 재산소유에 따라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금권정치를 시행하게된다. 그러나 솔론의 정책은 평민과 귀족이 모두 반대하여 실패를 하게되고 아테네는 큰 혼란에 휩싸인다.
솔론 사후 아테네의 혼란기에 페이시스트라투스라는 참주가 등장을 하고 기원전508년이 되어 클레이스테네스가 등장을 하여 참주의 등장을 막는 도편추방제를 실시하게 된다. 페이시스트라투스라는 참주가 등장을 하자 귀족세력은 참주에 의해 억압당하게 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참주가 아테네 민주정의 기본을 닦아놓은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클레이스테네스는 참주마져 소멸시키는 도편추방제를 통하여 아테네의 민주정을 완성시키게 된다.
도편추방제는 그리스어로 오스트라키자인이라고 하는데 도자기를 뜻하는 오스트라콘에서 파생되었다. 자유민은 도자기나 사기파편으로 참주가 될 우려가 있는 사람을 투표하여 추방하는 비밀투표를 행하였는데 도편추방제는 아테네 민주정치를 수호하는 방파제가 되었던것 같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중앙집권화 되지 못한 이유로 민주정치의 발달을 이유로 드는 몇 십년전 책자들이 자주 눈에 뜨이기도 한다. 몇 십년전 한국의 시대상황이 저자들의 관점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통일에 가장 방해가 된 근본요인은 그리스의 지형적인 요인이다. 개방된 평야에 자리잡아 역참제등을 통해 거대제국을 운영했던 페르시아나 로마 또는 몽골과는 달리 산악지방에 자리잡아 좋은 제도나 물산등을 교류하기 힘들었던 그리스의 처지로 보면 올림푸스제전이나 대페르시아전쟁같은 사건들은 나름 선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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