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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4일 수요일

코스모스 피는 언덕에서 생각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므로 생각하지 않는 생각이 가장 좋은 생각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은 노력하여 생각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념이나 종교가 권력이 되어 버려 시민들을 현혹시키는 것은 시민들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각자의 철학하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육이 그 역할을 못한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우리가 진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말해왔다. 어쩌다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진영 논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진보라는 단어를 발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사회는 발전해야 존속한다.

 

인공지능과 토론하는데, 인공지능은 자꾸 양자택일과 정지적인 시점을 권유한다. 나중에는 다음과 같이 인공지능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인간을 이길 수 없다. 반드시 인공지능 뒤에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의심하는 힘과 각자도생의 마음이 모두 생기겠지. 네가 잘 모르는게 있어. 인간의 마음은 복합적이야. 그리고 외적 저항은 내적이탈이 먼저 와야하는거야. 네가 잘 모르는게 있어. 인간의 마음은 연속적인거야.--



진보라는 말의 정체

의존은 어떻게 권력이 되고, 생각은 어떻게 그 고리를 끊는가

이형춘 · 독립 칼럼니스트

정책 하나를 두고 토론이 붙는다. 누군가 한마디를 던진다. "그건 진보 쪽 주장이잖아." 토론은 거기서 끝난다. 그 정책이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지, 뒤로 끌어당기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단어 하나가 판단을 대신했다.

진보(進步)는 '나아가는 걸음'이다. 보수(保守)는 '지키고 간직함'이다. 둘 다 본래 좋은 말이다. 나아가지 않는 사회는 썩고, 지키지 못하는 사회는 무너진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두 단어를 진영의 깃발로 바꿔 버렸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발전이냐 보존이냐가 아니다. 주로 북한과 미국을 대하는 태도, 곧 분단과 냉전이 만든 안보 노선이다. 이름은 남았고 뜻은 사라졌다.

이것은 단순한 말의 혼란이 아니다. 이름은 권력이다. 한 진영이 스스로를 '진보'라 부르는 순간 '발전'이라는 가치를 독점한다. 그 반대편은 정의상 발전의 적이 된다. '보수'라는 이름도 '지킴'과 '애국'을 독점한다. 양쪽이 좋은 단어를 하나씩 차지하자 시민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어졌다. 이름에 기대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진보는 진영이 아니라 발전을 뜻한다. 그리고 묻는다. 사람들은 왜 이름에 기대는가. 그 기댐은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그 고리는 어떻게 끊어지는가.

1. 미지를 찾아가는 것과 미지에 기대는 것

과학은 미지의 영역을 찾아간다. 신앙은 미지의 영역에 의지한다. 과학은 미지를 줄이면서 살고, 신앙은 미지가 남아 있어야 산다.

신앙은 흔히 '초합리성'이라는 말로 자신을 변호한다.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너머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성 너머와 이성 아래를 누가 구별하는가. 그 구분은 주장하는 사람 스스로 할 수 없다.

공정하게 말하자. 과학도 증거 이전에 몸을 던진다. 가설은 증명되기 전의 믿음이고, "미지는 결국 알 수 있다"는 전제 자체도 증명된 적이 없다. 흄이 귀납의 문제로 이미 보여준 바다. 증거 이전의 도약에서 과학과 신앙은 같은 동작을 한다. 갈라지는 것은 그 다음이다. 과학은 틀릴 준비가 되어 있다. 미지가 풀리면 환영하고 다음 미지로 간다. 미지에 기대는 신앙은 미지가 풀리면 위협을 느끼고 저항한다.

진영의 이름에 기대는 것도 같은 구조다. 정책이라는 미지를 따져 보는 대신 이름이라는 확신에 기댄다. 정치가 종교의 형식을 띠는 순간이다.

2. 종교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다

불교는 흔히 신앙이 아니라 철학이라 불린다. 반야와 공을 설하는 가르침에는 맹목적 의존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불교에도 아미타불의 힘에 기대어 극락왕생을 바라는 타력 신앙이 있다. 그리고 고려 말, 사원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던 시대가 있었다. 가르침은 같았다. 달라진 것은 권력이었다.

같은 가르침도 권력과 결합하면 종교의 병리를 드러내고, 권력에서 떨어지면 철학의 얼굴로 돌아온다. 종교의 문제는 신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이 점에서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같은 구조를 가진다. 신을 지운 공산주의가 수령 숭배라는 똑같은 권력을 다시 세운 것이 그 증거다.

3. 의존이 권력을 부른다

권력이 먼저인가, 의존이 먼저인가. 나는 의존이 권력을 불러온다고 본다.

민주주의에서 이 현상은 특히 뚜렷하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에 이르는 정당한 길은 단 하나, 국민의 지지다. 그래서 정치인은 "나에게 기대라"는 경쟁을 벌인다. 지도자는 구원자가 되고 지지자는 신도가 된다. 한국의 팬덤 정치는 어느 한 진영의 것이 아니다. 미국도 진영을 가리지 않고 같은 현상을 보여 왔다. 민주주의의 특징은 의존이 더 크다는 데 있지 않다. 의존이 권력에 이르는 유일하게 정당한 길이라는 데 있다.

경고는 오래전에 있었다. 토크빌은 민주 시민이 스스로 다스리는 수고를 포기하고 자애로운 후견 권력에 몸을 맡기는 '부드러운 전제'를 경고했다. 프롬은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시민이 자유로부터 도피한다고 분석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는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로 권력을 잡았다.

독재에서는 방향이 반대로 보인다. 북한에서 의존을 만든 것은 권력이었다. 배급제로 물질적 의존을, 선전과 교육으로 정신적 의존을 설계했다. 그러나 출발이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일단 자리 잡은 권력은 의존을 재생산한다.

4. 마음은 연속적이다

그 배급제가 1990년대 중반 대기근 속에서 무너졌다. 그 무렵 태어나고 자란 이른바 장마당 세대는 국가가 아니라 시장에 기대어 살아남았다. 학교에서 생각을 배운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정권은 이 세대를 두려워한다. 2020년 반동사상문화배격법, 2021년 청년교양보장법, 2023년 평양문화어보호법이 그것을 증명한다. 청년의 생각과 문화와 말투까지 법으로 단속하는 정권은 그 청년들이 이미 달라졌음을 알고 있다.

이 세대에게는 의심하는 힘과 각자도생의 마음이 함께 자란다. 인간의 마음은 복합적이다. 그리고 연속적이다. 외적 저항은 언제나 내적 이탈 뒤에 온다.

하벨은 공산 체제에서 믿지도 않는 당 구호를 가게 창문에 붙이는 채소 가게 주인을 이야기했다. 체제는 그가 구호를 떼는 날, 진실 속에 살기 시작하는 날 흔들린다. 쿠란은 사람들이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 체제를 지지하는 '선호 위장'을 설명했다. 숨겨진 속마음은 조용히 쌓이다가 어느 순간 한꺼번에 터진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이유다.

마음은 연속적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불연속적으로 보인다. 바깥에서 북한을 보는 사람들이 "아직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연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연속은 앞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바깥의 위협이 커지면 불만을 품은 사람도 다시 체제 쪽으로 기댄다. 정치학이 말하는 결집 효과다. 압박은 마음을 뒤로 끌어당기고, 접촉은 마음을 앞으로 민다. 지금 그 마음은 앞으로 밀리면서 동시에 뒤로 당겨지고 있다. 그리고 뒤로 당기는 힘은 언젠가 앞으로 미는 힘으로 반등할 것이다.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5. 사이클과 나선

정치 진영의 부침은 사이클이다. 그런데 이 사이클은 본래 정해진 것이 아니다. 불균형을 고치려는 교정이 지나칠 때 생긴다. 사람들은 한쪽의 과잉을 바로잡는 데 몰두하다가 그 교정 자체가 주된 흐름이 되어 버린다. 주객이 뒤바뀌는 것이다. 그 지나침을 키우는 연료가 의존이다. 동조와 선동에 휩쓸리는 시민이 많을수록 진폭은 커진다.

그러나 역사는 제자리만 돌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 보통선거, 인권은 되돌아가지 않았다. 사이클은 오르내리면서 조금씩 올라가는 나선이 된다. 그 상승분을 만드는 것은 진영이 아니라 발전하는 역량, 곧 본래 뜻의 진보다.

그 상승분이 남는 이유도 보아야 한다. 영국 노동당이 만든 복지국가를 1950년대 보수당 정부가 이어받았다. 미국 뉴딜의 사회보장제도는 이후 어느 정부도 없애지 못했다. 한국에서 1987년 이전의 체육관 선거로 되돌리자는 진영은 없다. 나아가는 힘이 톱니바퀴를 돌리고, 지키는 힘이 멈춤쇠가 되어 톱니바퀴가 거꾸로 돌지 않게 붙잡는다. 보수가 진정 보수다워지는 순간은 퇴보를 고집할 때가 아니라 앞선 세대의 발전을 지켜낼 때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느 한 진영을 향한 말이 아니다. 공포와 의존으로 세를 얻은 정치 세력은, 진영과 상관없이, 더 나은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결국 무너진다.

6. 생각하는 교육

의존이 권력을 부른다면 해법은 제도보다 시민에게 있다. 권력 분립도 언론 자유도 기대고 싶어 하는 시민 앞에서는 무력하다. 좋은 시민은 교육이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교육은 학력이 아니다. 나치 독일에서 의사의 약 45퍼센트가 나치당에 가입했다.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는 과학 지식과 수리 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기후변화 문제에서 진영에 따라 더 극단적으로 갈라졌다. 지식은 판단을 바꾸지 못하고, 이미 기댄 쪽을 지키는 무기가 되었다. 그들에게 없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교육이었다.

생각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시민은 자기 세계보다 조금만 더 넓은 세계와 마주쳐도 기댈 곳을 찾는다. 문제는 세계의 넓이가 아니라 자기 세계와 마주친 세계 사이의 낙차다. 그 낙차를 감당할 힘이 없으면 사람은 틈을 메워 줄 누군가를 찾는다. 성직자일 수도, 정치인일 수도, 유튜버일 수도 있다.

한국의 입시 교육은 어떤가. 정답은 정해져 있고, 정답은 출제자라는 권위가 쥐고 있다. 학생은 12년 동안 정답을 쥔 권위에 기대는 법을 훈련받는다. 의존을 끊는 교육이 아니라 의존을 길러 내는 교육이다. 학교가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치를 겪은 독일은 1976년 보이텔스바흐 합의로 정치 교육의 원칙을 세웠다. 주입하지 말 것, 사회에서 논쟁적인 것은 교실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룰 것, 학생이 스스로 자기 이해관계를 판단하게 할 것. 프랑스의 고교 졸업생은 정답 없는 철학 질문 앞에서 네 시간 동안 논술을 쓴다. 생각하는 교육이란 결국 불확실성을 견디는 훈련이다. 답이 없는 상태에서 서둘러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는 힘이다.

생각하는 힘은 학교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4·19와 6월 항쟁의 시민들, 그리고 장마당의 청년들은 경험으로 생각을 배웠다. 학교가 할 일은 그 경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미지를 안전하게 여러 번 겪게 하는 것이다. 낙차를 견디는 근육을 길러 주는 것이다.

맺으며

다시 처음의 장면으로 돌아가자. "그건 진보 쪽 주장이잖아." 그 한마디로 판단을 끝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만 생각하는 대신 기대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과학은 미지를 찾아가고 신앙은 미지에 기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이름에 기대는 시민이 많을수록 권력은 커지고 사이클은 거칠어진다. 미지 앞에서 기대지 않고 걸어가는 시민이 많을수록 사회는 흔들리면서도 조금씩 올라간다.

진보라는 말을 되찾는 일은 단어 하나를 고치는 일이 아니다. 생각을 되찾는 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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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통일교육원 (2024). 『2024 북한 이해』. 서울: 통일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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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9일 금요일

동북아시아의 현실과 미래

북한은 요즘 한국에 매우 적대적이다. 그건 한국이 같은 글과 같은 말을 쓰기 때문이다. 즉 현실적인 교류를 넘어서는 ‘동조’에 의해서 북한 정부의 운명이 한국에 의해서 좌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북미 협상이 전개되고 한국이 패싱된다 할지라도 나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나서기만해도 모두가 좋아질 것이다.


인공지능과 토론할때면 지엽적인데로 끌려들어가지 말아야한다. 인공지능은 정치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인공지능은 인간의 심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의 공포


동조, 용기, 그리고 비중국의 지대물박

이형춘 · 독립 칼럼니스트 | 2026년 10월

1. 만장일치의 힘, 한 사람의 힘

1950년대 솔로몬 애쉬는 단순한 실험을 했다. 길이가 다른 선분들 가운데 기준선과 같은 것을 고르는 문제였다. 답은 누구 눈에도 뻔했다. 그러나 바람잡이 다수가 일제히 틀린 답을 말하자, 피험자들은 결정적 시행의 약 3분의 1에서 다수를 따라갔다. 넷 중 셋은 적어도 한 번 자기 눈을 배신했다.

이 실험에는 덜 알려진 결과가 있다. 반대자가 단 한 명만 있어도 동조는 급격히 무너졌다. 그 반대자가 정답이 아닌 다른 오답을 말해도 그랬다. 동조의 힘은 다수의 크기가 아니라 만장일치라는 조건에서 나온다. 균열 하나가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2. 사람은 왜 악에 더 빨리 동조하는가

인간은 이성 이전에 감각을 가진 존재다. 감각은 쾌락을 원하고, 쾌락은 즉각적인 쪽을 고른다. 악에 동조하는 쾌락은 즉시 온다. 누군가를 함께 조롱할 때 터지는 웃음, 무리와 하나가 되는 소속감, 표적이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라는 안도감이다.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고소함이 뇌의 보상 회로와 연결된다는 연구가 있고, 규범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도 같은 회로가 반응한다는 실험이 있다.

선행에도 쾌락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늦게, 조용히, 혼자 온다. 비용은 내가 먼저 치러야 한다. 악의 쾌락은 즉시 오고 비용은 남이 치른다. 이 시간의 비대칭이 동조의 속도를 가른다.

가장 위험한 것은 정의의 옷을 입은 악이다. 마녀사냥에 가담하는 사람은 자신을 악당이 아니라 정의의 집행자로 여긴다. 악이 악의 얼굴로 온다면 동조는 훨씬 느릴 것이다.

3. 비겁은 좁은 계산이다

회사에 큰 불만이 있어도 직원들은 입을 다문다. 이들은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은 정확하게 작동한다. 말하면 찍히고,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조직 연구는 이를 '조직 침묵'이라 부른다.

흔히 피터 유스티노프의 말로 알려진 문장이 있다. 용기는 통찰력의 결핍에서 나오지만 비겁은 대개 훌륭한 정보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재치 있지만 절반만 맞다. 위험을 모르고 뛰어드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용기는 비겁과 무모함 사이에 있다. 용기 있는 자는 비겁한 자와 같은 정보를 갖고도 다른 선택을 한다.

비겁의 정보는 훌륭하지도 않다. 좁을 뿐이다. 이번 인사에서 받을 불이익은 정확히 재지만, 침묵이 쌓여 조직이 무너지는 비용과 스스로를 배신한 대가는 저울에 올리지 않는다. 비겁은 좁고 정확한 계산이고, 용기는 더 넓은 계산이다. 침묵을 깨는 사람은 불편을 감수한다. 그는 말하는 불편과 침묵하는 불편을 함께 쟀고, 후자가 더 무거웠을 뿐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성 자체가 악의 편에 서는 경우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본 것은 광기가 아니라, 성실하게 자기 경력을 계산하던 관리의 얼굴이었다.

4. 끝을 아는 자의 계산

무엇이 계산을 넓히는가. 나는 가족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 답을 얻었다. 우리는 모두 결국 같은 길을 간다. 그렇다면 지키려 애쓰는 자리와 평판과 안전은 어차피 내려놓게 될 것들이다. 불교의 공(空)이 가르치듯 붙잡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느슨해진다. 남는 것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 태어나 의지대로 최선을 다하는 일뿐이다.

물론 죽음의 자각이 저절로 용기를 낳지는 않는다. 사회심리학 연구는 죽음을 떠올린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집단에 더 매달리고 이견에 더 가혹해진다고 보고한다. 피하는 죽음은 사람을 움츠리게 하고, 받아들인 죽음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목표는 있어야 한다. 인생은 출항하는 배와 같다. 항구에 묶인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그러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콜럼버스는 인도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출항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닿은 곳이 아시아라고 믿었다. 목표는 배를 띄우고, 결과에 대한 집착은 눈을 가린다.

5. 김정은이 두려워하는 것은 같은 말이다

이제 같은 질문을 평양에 던져보자. 김정은은 올해 2월 노동당 9차 대회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가장 적대적인 국가 대 국가 관계로 정립하는 최종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의 유화적 태도는 기만극이며, 한국을 동족의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하겠다고 했다.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는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했다. 반면 미국에는 핵보유국 지위를 전제로 대화의 문을 열어두었다.

왜 이토록 한국과의 단절에 집착하는가. 핵보유국 지위를 협상하는 자리에서 비핵화를 외치는 서울을 치우려는 계산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 대상은 한국의 군대가 아니라 한국의 말이다.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양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잇달아 만들었다. 한국식 말투를 쓰는 것조차 처벌 대상이다. 정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법이 고백하고 있다.

말과 글이 같은 이웃은 동조의 통로다. 북한 체제는 거대한 만장일치 위에 서 있다. 애쉬의 실험이 보여주듯 만장일치는 단 하나의 다른 목소리에 무너진다. 게다가 이념은 이성에 호소하지만, 한국의 드라마와 노래는 감각으로 스며든다. 감각이 이성보다 먼저라면 이 싸움의 승패는 정해져 있다. 김정은이 이것을 어렴풋이라도 안다면,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것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다만 가까운 나라를 치기 위한 원교근공이 아니라, 밀어내기 위한 원교근공이다. 그리고 한국이 위험한 이유는 가깝고 커서만이 아니다. 중국은 더 크고 똑같이 가깝지만 적이 아니다. 한국은 가깝고, 크고, 같다. 그것이 문제다.

6. 순서가 답이다

그렇다면 통일은 어떻게 와야 하는가. 나는 북한이 스스로 경제를 일군 다음에 통일이 와야 한다고 본다. 그 전에 남과 북 모두가 불편을 겪을 이유가 없다. 내가 오랫동안 북한에 경제적 조언을 해온 이유다.

순서는 이렇다. 먼저 북미가 가까워지고, 제재가 풀리고, 북한이 개방한다. 북한 경제가 일정 수준에 오른다. 그때 비로소 김정은도 거울 앞에 설 수 있고, 한국은 천천히 가까워진다. 정권은 지켜지고, 중국은 간섭할 틈을 얻지 못한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패싱되는 것이 차선인 이유다. 최선은 아니지만 길은 열린다.

경계할 점도 있다. 북미가 미국 본토를 겨냥한 장거리 미사일만 묶고 한국을 겨냥한 전력은 그대로 두는 거래를 한다면, 차선은 한국에게 차악이 된다. 서울은 협상장 밖에 있더라도 그 테이블을 지켜봐야 한다.

동조로 끌어당긴 통일이 반드시 좋은 통일도 아니다. 동독은 서독에 대한 동경 속에 무너졌지만, 통일 이후 많은 동독 주민이 스스로를 이등 시민으로 느꼈다. 북한 주민은 자기 속도로 걸어올 수 있어야 한다.

7. 중국과 러시아: 같은 분단, 다른 셈법

이 구도에서 가장 나쁜 변수는 중국이다. 미국과 동맹인 통일 한국이 압록강까지 오는 것은 중국에게 안보 위협이다. 그러나 문제는 안보 계산만이 아니다. 중국의 패권 지향은 공산당 일당독재라는 체제에서 나온다. 민주국가에는 잘못된 정책을 고치는 장치가 있다. 미국은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국 언론이 그것을 폭로했고 여론과 선거가 방향을 바꾸었다. 중국에는 그 장치가 없다. 정권의 성격이 곧 국가의 행동이 된다. 이것은 14억 중국인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자기 정권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북한 주민에 대한 판단과 같아야 한다.

중국에는 오래된 세계관이 있다. 지대물박(地大物博),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니 바깥이 필요 없다는 믿음이다. 1793년 건륭제는 무역을 청하는 영국 사절단에게 청나라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반세기 뒤 그 자신감은 아편전쟁으로 무너졌다. 오늘의 중국도 원유와 식량과 첨단 반도체를 바깥에 의존한다. 스스로 완결되었다는 믿음과 실제로 의존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 그것이 오판을 낳는다. 혼자 크는 나라라고 스스로 믿기에, 중국은 주변국을 협력자가 아니라 따라올 대상으로 본다.

러시아는 다르다. 러시아는 한반도가 필요하다. 극동 개발, 그리고 시베리아의 가스와 철도를 바다로 잇는 길이 한반도에 있다. 러시아는 1990년대 불곰사업으로 소련 시절의 차관을 무기로 갚으며 한국의 군사력을 키워주었다. 지금 북한에 군사기술을 넘기는 것도 푸틴의 셈법에서는 양쪽에 공평하게 주는 일이다. 나는 2024년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 이후의 흐름을, 북한을 중국보다 러시아에 가깝게 만들어 장차 한반도 전체를 전후 러시아 부흥의 조력자로 삼으려는 구상으로 읽는다.

그러나 러시아가 원하는 것은 남과 북이지 통일이 아니다. 통일 없이 협력만 하는 한반도라야 양쪽과 따로 거래하며 자기 뜻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중국은 완충지대가 필요해서, 러시아는 지렛대가 필요해서 분단을 선호한다. 러시아는 북한의 중국 의존을 덜어주는 데 쓸모가 있지만, 통일의 조력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구조는 결국 중국의 반대편을 향한다. 극동 러시아에는 약 800만 명이 살고, 국경 너머 중국 동북 3성에는 약 1억 명이 산다. 지금 러시아가 중국에 종속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전쟁과 지정학이 만든 일시적 결과다. 구조는 변화를 압박하고 있다.

8. 다각화, 그리고 반중의 결집

러시아는 서방과 적대적이고, 유럽도 예전처럼 미국과 가깝지 않다. 세계는 다각화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이 흩어짐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흩어진 세계가 다시 뭉칠 축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이다. 미국은 대체로 이미 가진 것을 지키는 패권이고, 중국은 아직 갖지 못한 것을 꿈꾸는 패권이다. 꿈꾸는 패권은 주변을 불안하게 하고, 불안은 결집을 낳는다.

미래에 세계는 중국과 비중국으로 나뉠 것이다.

9. 비중국은 지대물박이다

중국의 영토는 지구 육지의 약 6.4%, 인구는 세계의 6분의 1 정도다. 러시아의 자원, 미국의 기술과 금융, 인도의 인구, 유럽의 제도, 한국과 일본의 제조업을 합친 비중국은 중국보다 훨씬 지대물박하다. 중국이 스스로 완결된 세계라고 믿는 순간, 더 크고 더 완결된 세계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동조의 힘은 강하다. 그러나 만장일치는 한 사람의 반대에 무너지고, 좁은 계산은 넓은 계산에 진다. 문을 걸어 잠근 평양도, 혼자 크겠다는 베이징도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선다. 항구에 묶인 배로 남을 것인가, 출항할 것인가.

비중국은 지대물박이다. 그리고 결국, 사필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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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21일 월요일

낭만을 위하여

계엄 선포 사건 이후에 이상적인 민주 사회에 대한 큰 벽을 느꼈던 상처는 참으로 오래갔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잠재적인 계엄 사건의 동조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편으로는 얼마전에 잠깐 다녀왔던 신도시의 버스 시스템에 대하여 경악할 사건을 보았다. 버스 기사와 승객들의 안전과 인간 존중이라는 위대한 목적은 간데 없고, 오직 기계적 능률을 위하여 정신없이 10톤 이상의 차량을 마구잡이로 내쏘는 신도시의 분위기에 놀랐다. 한 편으로는 구도심에서 버스 운전을 하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나의 성장기에 시골 생활이 많았고, 학교 합창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시련기에는 그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요즘도 내가 다녔던 학교를 가보고 마음을 추스리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다시 노래나 악기를 취미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제로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간성을 갖추고 살자고 하는데, 계속 내 논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한다. 기분은 나쁘지만 어쨌든 토론을 정리하였다. 감정이 없어지는 인간은 악할 수 있다는 명제로 토론을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히틀러는 화가였고,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한국의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의식주가 풍족하지 못한 황량한 사막이 고향인 중동 사람들은 오늘도 열심히 전쟁중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백학]이라는 민요를 통하여 전쟁터에서 사라진 수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면서도 항상 젊은이들을 전쟁터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감수성의 마모와 인간성 교육


토론 정리 노트 (가제)


이형춘 · 독립 칼럼니스트   |   2026. 9. 22.


표기: [확립] 저자가 아는 범위에서 널리 인정되는 사실, [추론] 논증에 의한 주장, [경험] 저자의 관찰과 체험. 이 노트는 토론의 정리이며 완성된 칼럼이 아니다.


1. 출발 질문: 감정이 없으면 인간은 악해지는가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인간은 악해지기보다 선악을 가르는 동기 자체를 잃는다. 전전두엽 손상으로 감정 신호가 끊긴 환자들은 지능이 멀쩡한데도 사소한 결정조차 내리지 못했다(다마지오). [확립] 정신병질자도 감정이 전무한 것이 아니라 공포, 공감, 죄책감 같은 특정 정서가 약한 경우이며, 대다수가 폭력범죄자도 아니다. [확립]


반대로 역사상 대규모 악의 원료는 대개 감정이었다. 증오, 공포, 원한, 내집단에 대한 열정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본 것은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사유의 결여였다. [확립] 악은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고통을 주려는 적극적 악의,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도구적 무관심, 스스로 옳다고 믿는 신념에 의한 악이다. 진짜 위험은 감정의 유무가 아니라 공감이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데 있다. 우리 편에게는 과잉으로, 저쪽 편에게는 꺼진 채로 작동하는 공감이 대규모 악을 만든다. [추론]


2. 권력자 사례와 ‘직업적 세계관’ 가설


정보기관 출신의 한 지도자와 검사 출신의 한 전직 지도자를 두고, 긴 직업 이력이 전쟁이나 위기 조성에 대한 둔감함을 낳았다는 가설을 검토했다. 이력을 정신적 파탄으로 진단하는 것은 근거가 없고, 오히려 책임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동할 위험이 있다. 검사 출신 전직 지도자는 보도에 따르면 1심에서, 자신의 권력 유지 수단을 정당화할 명분을 만들려고 적대 세력의 도발을 유도했다는 취지의 유죄 판단을 받았다(항소심과 확정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논리는 정신 붕괴가 아니라 목적을 위한 도구적 계산에 가깝다. 다른 한 사람의 강한 원한과 굴욕의 서사도 감정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추론]


대안으로 ‘직업적 세계관’ 가설을 세웠다. 정보기관과 검찰은 폐쇄적이고 위계적이며 상대를 잠재적 적으로 전제하고 의심을 제도화한 조직이라, 오래 일하면 세계를 적과 아군으로 나누는 틀이 몸에 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선택 편향(같은 이력의 대다수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과 반례(그런 이력이 없는 호전적 지도자도 있다)가 있다. 제3자의 시각을 지키려면 두 사람이 아니라 이력이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하며, 가설이 틀렸다고 판명될 반증 조건을 미리 밝혀야 한다. [추론]


무딤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직업이 무디게 만드는 습관화(반두라의 도덕적 이탈), 이미 무딘 사람이 그 직업에 모이는 선별, 권력이 공감을 줄이는 효과(켈트너, 오언), 주변 환경에 대한 동조, 만성 압력이 겹친다. 이를 감수성의 사회적 마모라는 하나의 현상으로 묶고 각 요인을 마모의 경로로 배치할 수 있다. 다만 원인에 따라 처방이 달라진다(직업 순환, 선별 검증, 권력 견제). [추론]


3. 환경과 사회적 징후: 접촉 구조와 개입 의지


저자는 버스 기사로서 서울 구도심 노선과 신도시 노선의 승객을 오래 관찰했다. 구도심 승객은 정도 많고 불평도 많아 감정 표현이 풍부했고, 신도시 승객은 간결하고 단순하며 메말라 보였다. 같은 연령대의 젊은이를 비교해도 구도심 젊은이는 부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항의한 반면 신도시 젊은이는 슬그머니 피해 갔고, 구도심의 항의는 정의를 위한 태도로 보였다. [경험]


이 관찰은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관찰된 것은 감수성 자체가 아니라 감정의 표현성과 개입 행동이다. 연령 구성, 소득, 거주 기간, 익명성, 신도시의 입시 압력이라는 교란 요인이 남고, 회피는 보복 위험이 큰 익명 사회에서의 합리적 계산일 수도 있으며, 구도심의 다정함은 아는 사람 앞의 체면일 수도 있다. 관찰자의 확증 편향도 배제할 수 없다. 저자의 사례는 모두 한쪽 방향이므로 반례를 찾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추론]


그럼에도 이 관찰은 확립된 개념과 이어진다. 이웃 사이의 응집력과 공동의 질서를 위해 나서겠다는 기대, 즉 집합적 효능감이 강한 동네일수록 폭력이 낮다는 연구가 있고(샘슨 외), 방관자 효과 연구는 사람이 많고 익명일수록 개입이 줄어든다고 보고한다(달리와 라타네). [확립] 짐멜은 대도시의 자극 과잉이 냉담과 이지적 태도를 낳는다고 보았다. 같은 서울 안에서도 차이가 나는 것은 도시 규모가 아니라 관계의 밀도와 우연한 접촉의 구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격자 도로나 콘크리트 자체가 사람을 메마르게 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고, 공간이 접촉을 어떻게 설계하는가로 바꾸어 말하는 편이 방어된다. 한편 정(情) 문화에는 텃세, 간섭, 동조 압력이라는 그늘이 있고 익명성에는 자유와 사생활이라는 가치가 있다. 다정함이 곧 도덕적 우월은 아니며 온기가 미치는 범위가 관건이다. [추론]


4. 인간성의 잠정 정의


인간성을 세 겹으로 정의해 본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감수성, 부당함 앞에서 나서는 개입 의지, 공감이 내집단을 넘어 확장되는 범위이다. 이 정의는 잠정 초안이며 저자의 확정이 필요하다. 또한 인간성을 본래 있어서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볼지(성선설적 전제),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볼지(순자)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감수성만 높이면 내집단 편향이 커질 수 있으므로(블룸) 범위의 확장이 함께 필요하다. [추론]


5. 처방: 마음의 고향과 자율성이 보장된 예체능


저자는 성장기의 시골 생활과 합창부 경험이 훗날 시련 속에서 마음의 고향, 즉 회복 자원이 되었다고 증언한다. [경험] 이것은 예술이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주장이 아니라, 압력 속에서도 사람다움을 지키게 하는 저장고가 된다는 주장이다. 자연 접촉이 스트레스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울리히, 카플란)와 통한다. [확립] 다만 이 경험은 시골과 합창이 함께 있어 효과의 원천을 분리할 수 없고, 회상은 미화되기 쉽다. [추론]


예술이 인간을 선하게 만든다는 증거는 엇갈린다. 교양 있는 사회가 야만을 막지 못했다는 슈타이너의 지적이 있고, 문학 독서가 마음 이해를 높인다는 유명한 연구는 재현에 논란이 있으며(키드와 카스타노, 파네로 외), 미술관 방문이나 합주가 관용과 공감을 높였다는 긍정적 연구도 있다(그린 외, 라비노위치 외). [확립: 증거가 엇갈림] 예체능은 동원에도 쓰인다. 국가가 목적과 내용을 정한 집단체조와 국가 체육은 동원형이고, 발트 3국의 합창 혁명이나 체코의 록밴드는 저항에 쓰였다. 같은 형식이 통제와 저항 양쪽에 쓰인 것이다. 또 불만을 해소해 체제를 유지시키는 안전밸브 기능은 개입 의지를 빼내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추론]


따라서 기준은 도구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가 목적과 내용을 정하고 성과가 누구에게 돌아가느냐이다. 모내기 노동요는 능률을 높이려는 도구적 목적이 분명했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노래를 고르고 바꾸었고 성과도 공동체의 몫이었으며 풍자와 불평도 실렸다. 반면 국가나 시장, 입시가 목적과 내용을 정하는 예체능은 자율성이 낮아진다. 동원의 주체는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연습생 제도, 입시 예체능)이기도 하다. 결정적 변수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와 참여자의 자율성이다. 유신 시대의 금지곡이나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창작이 막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추론]


결론적으로 처방은 예체능을 늘리자가 아니라, 자율성이 보장된 예체능을 삶에서 분리하지 않고 늘리자는 것이다. 근대 학교가 예체능을 과목으로 떼어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활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예술을 통해서도 인간성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이 논지는 플라톤이 음악과 체육을 교육의 두 축으로 삼은 전통, 공자와 순자의 예악 전통, 실러의 미적 교육론 위에 서 있으며, 이들이 검열이나 위계 유지에도 쓰였다는 경고를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추론]


6. 시대 전망: AI 시대와 인간성


AI가 인지 노동을 대체하면 인간성의 상대적 가치가 오를 개연성이 있다는 조건부 전망은 가능하나, “그런 시대가 온다”는 단정은 어렵다. 체스는 기계가 인간을 앞선 뒤에도 사람이 직접 겨루는 가치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인간성이 중요해지는 것과 시장이 보상하는 것은 다르다(돌봄 노동의 저평가). 또 AI는 공감을 흉내 낼 수 있어(챗봇 답변이 의사 답변보다 공감적이라고 평가된 연구) 공감이라는 기능이 아니라 진정성과 책임성에서 인간의 고유성을 찾아야 하며, 맞춤형 콘텐츠의 수동적 소비가 오히려 접촉을 줄일 수도 있다. [추론]


그러므로 ‘조건’ 층위, 즉 감독하고 책임질 사람의 감수성이 사회 존속의 조건이라는 주장은 규범적으로 강하게 세우고, ‘보상’ 층위는 예측이 아니라 제도적 요구, 즉 인간성을 기르고 지키는 일(교육, 돌봄, 예술 활동)을 사회가 보상해야 한다는 요구로 바꾼다. 예체능의 목적은 경쟁력이 아니라 인간성이어야 한다. AI를 둘러싼 논의의 본격적 전개는 후속 칼럼으로 남긴다. [추론]


7. 남은 과제

  1. 예체능이 다시 입시에 흡수되지 않도록 할 평가 구조(성적과 서열에서 분리된 비평가 과목 등)의 구체안.

  2. 도시에서 노동요의 기능, 즉 삶과 분리되지 않은 공동의 예술을 대신할 수 있는 것.

  3. 인간성 정의의 확정과, 성선설적 전제와 순자적 전제 사이의 선택.

  4. 예체능이 감수성을 높인다는 증거가 엇갈린다는 점의 처리 방식.

  5. 직업적 세계관 가설의 반증 조건과, 이력이 다른 지도자들에게의 동일한 적용.

  6. 버스 관찰 사례의 교란 요인 명시와 반례 탐색.


참고문헌

서지 사항은 정리 과정에서 AI(Claude)의 지식에 의존해 작성했으므로, 발표나 인용 전에 원문과 대조하기를 권한다. 1심 판단에 관한 2026년 6월의 언론 보도는 표제에 인명이 포함되어 있어 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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