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겪고있는 힘든 상황을 벗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지"하는 생각은 결국 기만이다.
좋은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좋은 날이 오도록 노력할 뿐이다. 이념과 종교가 주는 파라다이스에 대한 약속을 믿을때 그 약속이 주는
평화로운 혜택을 입는 사람들은 '노력'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기만당하고 자신이나 하느님, 또는 타인을 원망하며 삶을
종결짓게 될 것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에테(1749-1832)의 철학적인
문학작품 [파우스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메고 있다],
[쉽지않은 고생을 하고 온갖 학문을 닦고 그런데도 이 모양이야,가엾게도 나라는 바보가 옛날보다 조금도 영리하게 되어 있지
아니잖나.]
파우스트의 고민은 인간 모두의 고민일 것같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메피스트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결국 고민은 고민으로 남을 뿐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욕망이 존재의 이유고 의식의 저변에 자리잡은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생존할려는 욕구의 덩어리고 인간은 많은 고차원적인 방법을 통하여 좀 더 생각하고 노력하며 생존할 뿐일
것이다.
노력의 뒤에는 그 노력을 방해하는 잡음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세르(Michel Serres 1930 - )는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고 말한다. 만약 있다면 파라젯(노이즈)을
배제함으로서 만들어낸 형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열린 시스템에서는 노이즈의 간섭이 있고 그 간섭에 저항하며 창조성이 정돈되어 간다고 말한다.
노이즈는 한낮 짐일 뿐이지만 존재하게 만드는 이유일수도 있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사회적 잡음을 차단시키는 국가시스템은 발전할 수 없으며, 고생해보지 않은 인간 역시
발전할 수 없다는 구체적인 해석을 해도 될 것 같다. 사회와 개인의 보수성은 노이즈를 원천 차단시킬려는 허황된 노력으로 정체와 퇴보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북한 사회는 잡음을 제거할려고 스스로 고립시킴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고 있고, 한국사회 역시 이념을 구실삼아 안일하게 주저앉아 잡음
제거에만 힘쓴다면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태어나서 어려운 일을 겪고, 고민하며 발전해 나가는 것은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인간과 사회는 정적(停的) 시스템이 아닌 동적(動的)시스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쩌면 진보와 보수의 적절한 대립은 서로 노이즈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발전의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생각하게도 한다. 고민하는 것이 아무 생각없음보다 나을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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