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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이념적 돌연변이 (Ideology mutation)

돌연변이란 유전적 형질의 변형이 자손에게까지 전달되는 현상을 말한다.

1930년대 말에 독일에서 탈출하여 당시에 에딘버러에서 일하던 유전학자 샤롯 오어바크(Charlotte Auerbach)는 독가스를 사용하여 화상을 발생시켰다. 독가스는 돌연변이의 빈도를 증가시켰으며 이 결과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비밀로 취급되었다.  

어제 대학교수이자 시사평론가들의 토론을 보았다. 토론의 궁극적 결말은 우파와 좌파라는 이념적 프레임속에 매몰되고 있었다.한국현실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토론의 지향점을 국민의 삶과 국가의 발전에 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과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이념적 주관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 토론을 하고 있었다. 석학이라는 사람들이 이 정도면 국민들의 정신세계란 논할 필요도 없는듯 하다.

독가스에 의해서 손상이 된 유전인자처럼 한국인의 의식세계는 이념적 프레임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대손손 유전될 것 같다.

다음의 핀란드와 북한의 어린이책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알려주는 유전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듯 하다.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대선과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저팔계가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한그릇을 아주 아주 맛있게 먹고, 두그릇도 아주 맛있게 먹고, 세그릇도 맛있게 먹고, 네그릇은 그럭저럭 맛있게 먹고, 다섯 그릇은 그냥 먹고, 여섯 그릇은 꾸역 꾸역 먹고, .................억지로 아홉 그릇을 먹었다. 돈을 지불하고 나가려고 하자 쥔장이 그냥 드릴테니까 열그릇을 채우라고 말하였다. 저팔계는 소리를 질렀다. "내가 돼진줄 아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란 재화의 소비가 늘어날수록 만족도가 점차로 감소하는 현상을 뜻한다. 물론 재화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용역이라던가 학문과 이념 모든 부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선투표를 할려고 하는데 투표할만한 후보가 우파를 대표하는 후보와 좌파를 대표하는 후보 두사람만 달랑 있다. 잘은 모르지만 (정치인은 실증적 관점과 규범적 관점을 적절히 조화시켜가며 평가해야 하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같은 미물은.......)개인적으로 두 후보가 모두 마음에 끌리는 면이 있긴한데 후보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정치적 배경이 저팔계처럼 소릴 지르고 싶게 만든다.

이념이 시민들에게 생명력을 가져다 주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 시절엔 이념에 관한 모든 것이 감동이었고 웅장했다. 목숨을 바쳐도 될만큼 가치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자유를 위해 전장에서 피를 흘리거나 권력의 압제에 목숨을 바쳐 대항하면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숭고한 죽음이기를 바랬는데 시간이 흘러도 변한게 없는것 같다. 습관처럼 고치기 힘든게 없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이념적 분란은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 같은 생각이다.

플라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부분은 전체가 좋아지지 않으면 좋아질 수 없다."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회의제 정부형태

정부의 수장이 없고,인민들의 직접민주정치에 의해 정부가 운영되는 방식이 기본적 형태다.

루소가 제안한 인민주권정부형태와 관련있고, 국민주권주의는 국민이라는 통합체가 주권자이기 때문에 국민의사를 대표할 수 있는 대의제 정부형태를 선호하는 반면 인민주권주의는 개개인의 의사표현이 주권적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직접민주주의 방식의 정치형태와 관련이 있다. 

사회주의 정부는 회의제로 많이 운영한다. 논리상 집권적인 수장을 인정하지 않기때문에 '주석'이란 명칭으로 수장의 존재를 인정한다.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단지 주된 자리에 있다는 의미다.

중국의 전인대방식이 대표적인 회의제방식이 되겠고,그외 변형된 형태로서 한국의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있다. 북한도 명목적으로는 회의제 방식의 정부지만 수장 1인의 강력한 집권체제로 운영되어왔다. 

북한은 김정일 사후에 김정은의 통치권을 보위하기 위해서 회의제정부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회의제는 권력분산이 아닌 권력집중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시민의 경제

어떤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가 재직기간내내 똑같은 시험문제만 출제하자 학생이 그 이유를 물었다. 교수는 문제는 같아도 답은 매년 바뀐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창시자인 아담스미스의 경제이론이 시장실패(불경기, 빈부격차, 공유지의 비극등)현상을 보이자 케인즈는 정부의 재정지출을 통해 유효수요를 증대시켜 불경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시장실패를 치유했다. 그러나 정부실패(스태그플레이션, 거대정부의 관료주의등)의 부작용을 가져왔다. 통화주의자 프리드먼은 정부지출의 승수효과는 민간소비와 투자를 몰아내는 구축효과(驅逐效果)에 의해서 상쇄되어 무용한 경제정책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을 내놓음으로써 노벨상을 받았다.

시대의 경제흐름을 뒤바꿔 놓는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극단적으로 우파와 좌파의 대립과 투쟁으로 전환되어 받아들여지는 감이 있다. 

케인즈의 재정정책이 수정되지 않고 깊은 문제의 골을 만든 다음에야 통화주의자들에게 포착이 되고 적극적으로 케인즈의 정책을 뒤집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가장 경제현실에 민감했던 시민들이야 문제점을 포착해도 의사표현의 언로가 불충분하거나 정부선전의 착시효과에 의해서 현실은 어려워도 '이상과 기분'만으로 '그럭저럭 삶을 꾸려나가다 보니 한평생이더라' 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는것 같다.

과연 시민들은 무한정한 번영과 안정중에서 안정을 중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번영이라는 것은 안정을 위한 현시적 투자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창업보다 공무원시험을 택할 수 밖에 없는 한국의 청춘들의 선택은 한국의 경제현실과 인간의 욕구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기도 한다.  

무역총액 1조달러를 달성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하지만 한국민들에게는 실업과 불황이 햇볕없는 겨울 정서와 합체해 짙은 우울함을 드리우고 있다. 수치적인 업적과 현실감의 괴리는 말기암 환자의 건강한 외모만큼이나 충격적인 날을 예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제와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다. 이념적 프레임을 벗어난 '시민들의 체감'을 기준으로 과거 경제정책의 성과를 측정하고, 미래경제정책의 계획을 입안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들어오고 나가는 돈 1조달러는 어디서 움직이는 것일까? 그 돈들은 산업공동화현상으로 인해서 해외에서만 돌고 있지 않을까? 복지정책은 좌파적인 정책이 아닌 내수를 부흥시켜서 투자와 생산을 확장시키는 가장 우파적인 정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케인즈의 시대는 모두가 케인지안이었고 프리드먼 시대에는 모두가 통화주의자였다고 하는데 요즘은 시민들의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는것 만큼 공론화 되지 않는 말이기도 한 것이 '정부정책은 민생을 가장 중요한 목적과 평가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오빤 권위스타일

스스로 정치적 의식을 표현하지 못하는 한국청소년들의 문제점을 토로한 내용이 담겨있는 글이다.


정형적인 사회적 시스템안에서의 지위라든가 평범한 생활인의 모습을 희생시키는 반대급부로서 자율적이고 근본적인 생각을 미미하게나마 얻어내는 내 견해로서는 선거연령초반의 젊은이들이 제대로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젊은 유권자를 불신하는 견해는 아니고 젊은 유권자들이 현재의 정규적교육시스템안에서 올바른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는지, 정치적 교육 방식에 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일관되게 이념의 문제점을 토로하고 있는  견해로서도 이념이란 프레임은 단순한 지식 쌓기에 벅찬시간에  두루 두루 생각하지 않아도  내놓을 수 있는 인스턴트같은 정치적인 견해를 제공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많은 연령대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정치에 관한 기성세대의 교육방식을 눈치채는 경우가 많은데, 한 예로 4050세대들의 비교적 공통된 스타일은 "오빤 권위스따일이다."라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장기적인 집권을 한 전대통령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기도 하다,

그 당시 시대상황이라던가 국민교육수준등을 고려하여 부정과 긍정의 평가를 골고루 배치한다고 가정해도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은 정치지도자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면면히 투영되어 오는 스타일이다. 4050오빠들의 기존 지도자의 스타일을 외형적으로 닮아간 모습이 노신의 소설에 나오는 '아큐'의 모습만큼이나 우스워 보이는 경우가 많았던것 같다.

카리스마넘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고, 남자라면 더구나 군복까지 입었으면 설상가상(내지는 금상첨화), 게다가 레이벤(나이방)까지, 한 술 더떠서 어떤 종류의 술까지 찾아 다니고,일터에서, 운동장에서, 놀이터에서 한 자리 꿰차고 싶은 권력의지가 면면히 내려오고 있고, 그것들이 교육시스템안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한 의지가 있으면 강한 반대의지도 탄생한다. 마초적인 오빠들의 권위문화는 성차별의 논란을 불러 일으키면서 언니들의 사회적 위치를 강화시킬려는 움직임은 당연히 생겨난다. 그래서 없어도 되는 여성부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견해를 스스로 가질 수 있는 여유를 준다면 조금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를 끌어갈 수 있는 지도적인 인물들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교육문제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등 모든 분야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진보라고 말하고, 기존의 것을 보수라고 하는 프레임이 엉뚱한 '시청각교육'으로 부터 비롯되는 우매함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우매함은 쓸데없는 분란을 증폭시켜서 그걸 '정치문화'라고 떡하니 내놓는 현실이 안타갑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