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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안정되고 번영하면서 ‘극우’나 ‘극좌’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지만 중동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이란에서는 강경 보수파 종교 지도자인 라이시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석유가 없다면 중동의 정치와 경제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조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막 지역의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통합되기 어려운 중동정치는 끊임없이 극도의 통합력을 가진 지도자를 원하는 것 같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 – 1980)는 미리 정해진 보편적인 삶의 방식은 없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여러 근린 지역에서 버스 운전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발달한 지역사회일수록 합리적인 민원이 발생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에서는 민원인의 건강이나 나이, 생활수준 등에 의해 민원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발달하지 못한 지역의 비합리적 민원조차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기 때문에(때로는 더욱 강렬하다) 버스교통정책에 쉽게 반영될 수 있다. 말하자면 자극적이고 비합리적인 민원이 교통정책에 우선 반영되는 그래샴의 법칙(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이 달성되는 것이다.
척박한 조건을 가진 국가의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자극적인 피드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가 불안하면 선동정치가가 표를 얻는다. 선동정치가는 10퍼센트의 근거를 가지고 90퍼센트의 현상으로 비약시킨다. 어려운 환경에 직면한 대중이 자극을 받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종교는 대중을 자극하는 좋은 도구로서 이용되는 경우가 생긴다.
생각해보면 이념적인 패러다임이 경제적인 패러다임으로 변하면서 온건해지고 안정되어가는 한국의 정치세계는 중동지역과 조건이 유사한 동아시아에서 보기 힘들게 성공한 경우인 것 같다.
경제에 대해서 이념문제와 엮자면 폴 크루그먼 교수의 언급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회의론자들의 예상을 뒤업고 자본주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 생존은 기본적으로 케인즈가 제안한 조건들에 기초한 것이었다(오늘 날 자유시장 광신자들은 이 점을 인정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케인즈가 수년 간 역설해 온 ‘재시동’의 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 회복은 대공황극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경기후퇴를 막기 위한 이자율 인하 또는 재정적자폭 확대와 같은 거시경제적 개입이 자유시장경제의 안정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완전고용도 일정 부분 담보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와 이를 믿는 경제학자들은 ‘우리는 두 번 다시 대공황이 없도록 방지할 방법을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자유시장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와 같은 논리로 대중과 일종의 거래를 성사시킨 셈이다.
-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BY PAUL KRUGM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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