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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31일 금요일

일본의 단기적 경제기적 / 폴 크루그먼

https://hyeong-chun.blogspot.com/search?q=%EC%A4%91%EC%86%8C%EA%B8%B0%EC%97%85

60년대와 70년대 일본의 급속한 경제성장,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 한국의 '한강의 기적'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전쟁후복구를 위한 수요의 증대가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집권적 정치문화가 그 여세를 몰아 오랫동안 경제를 활성화 시켰다는 사실이다. 일본경제의 성장은 멈추었고, 한국경제의 저변에는 70년대의 경제팽창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이념문제와 엮여서 경제여론에 투입(input)될려는 움직임이 심상치않다. 하지만 후퇴하지 않는 독일경제를 생각하면 서구적 시민사회의 지구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There was a certain irony in the timing of the great debate about Japan: the truth was that the heroic age of Japanese economic growth ended just about the time Westerners started to take Japan seriously. In the early 1970s, for reasons that are still somewhat mysterious, growth slowed throughout the advanced world. Japan,which had had the highest growth rate, also experienced the biggest slowdown- frome 9 percent a year in the 1960s to less than 4 percent after 1973.

Although this rate was still faster than that of any other advanced country (half again as fast as that of the United States), at that rate the date of Japan's emergence as the world's leading economy would have to be put off well into the twenty-first century.

Still, Japan's growth performance was, literally, the envy of other nations. Many people argued not only that japan figured out a better way to run its economy but also that its success came at least partly at the expense of naive Western competitors.

  - Paul Krugman [THE RETURN OF DEPRESS on ECONOMCS AND THE CRISIS OF 2008]-

한때 일본을 부러워했던 서구사회가 통계적 성장보다는 시민사회의 복리적 성장에 목표를 두고 민주적인 INPUT과 OUTPUT이 교차하는 가운데 장기적인 성장 또는 시민중심의 성장을 이루어온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사회는 많은 비율의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에 노동정책의 화살이 쏘아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집권세력인 재벌개혁이 없으면 국가경제자체를 살릴 수 없다는 혹독한 결론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일본경제도 재벌중심의 경제이긴 하지만 국가분위기 자체가 공적인데 편승하여  한국보다 중소기업과의 상생(相生)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First, while cronyism and corruption were very real in Asia, they were nothing new. Korea's chaebol were essentially family enterprises disguised as modern corporations whose owners had been accustomed to special treatment for decades.

    - Paul Krugman [THE RETURN OF DEPRESS on ECONOMCS AND THE CRISIS OF 2008]-

2018년 8월 18일 토요일

동양의 시민과 고대 아테네의 시민

가끔 지인들이나 일터의 동료들에게 정치적 참여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한다. 이유인즉슨 열심히 근로하며 아기자기한 시민의 삶을 꾸려가야 하는 시기에 많은 기회비용을 들여서 할 말을 하고 있던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경우가 가끔 있었기때문이다.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적 관심을 가질 수 없다"라는 답변이었다. 그렇긴 하다. 한국뿐만 아니라 특히 일본같은 국가의 시민들은 근면 성실, 거국적 협동, 지하자원등의 부족으로 인한 어려운 국가생존여건을 명분삼아 비정치적인 시민을이 만들어져가는듯 하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는 시민은 간편한 정치참여의 방법을 찾는다. 그러다보니 철학적이거나 이성적이지 못한 대중정치가 만연을 한다. 마국사회의 대중은 사회적 자유라는 명분으로 선거와 같은 공식적 정치참여외에 정치에 무관심한 경우가 있지만 한국과 일본은 전혀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듯 하다. 바쁜 직업활동, 경제적 욕망,한국은 이념적 갈등을 안고 있는 정치의 극단성이 가져다 주는 부담(대게 어느 한 편에 서면 다른 편으로 부터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는 것을 체험했다.) 

Democracy as a system survived in Athenes for nearly two hundred years, on and off, though it never caught on widely in the ancient world. To work, it demanded an educated citizenry though only perhaps a tenth of them could actually read as well as people who had learned how speak publicly, to reason and to follow complicated argument. This development of what we might call civil society was important as the results of voting.

Athenian 'democracy' did not include women, younger men or slaves, however. As Athens developed her gorgeous architecture and sculpture, her theatre and music and philosophy, she relied on slaves just as much as unsmiling Sparta did. And as Athens came to depend ever more on her silver mines to by the corn she could not grow herself, huge numbers of slave miners wer imported: one account suggests 150,000 at one time. But slaves were used heavily on farms as well - the historian Xenophon refers to twenty thousand absconding from Athenian farms during a Spartan invasion -  and as paid craftsmen, including for the great public buildings. It has been estimated that for every free male Athenian citizen there were two slaves.

Without the slaves, captured in wars, the Greek farmers could not possibly have spared the time to learn to speak and vote, or to serve as active citizens ; nor could the Greek aristocrats have enjoyed the wealth and leisure to study philosophy. Again, it was war that under pinned the 'Greek miracle - and rather more substantially than many of its admirers like to admit.

- ANDREW MARR 의  [ A History of the World ] 중에서-      

그리스 아테네의 문화적 번영과 민주정치의 발전은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한 시민의 여유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인데, 일하는 사람은 정치문제에 대해서 피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쯤 되면 일본사회가 왜 정치적으로 수동적이며 보수적이고 규율에 복종하기를 좋아하는지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은 국민소득이나 국가경제규모에 비해서 아직도 블랙기업이나 파견근로등이 많고, 야간근로에 지친 근로자들의 자살 소식이 자주 들려오는 기이한 사회다. 한국사회는 지리적 인접성과 문화접변에 의해서 일본사회를 많이 닮아가는 성향이 있다. 특히 근로문제에 대해서 인간중심의 근로현장을 만들지 못하고, 효율적인 함의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소홀히하는 문제가 있다. 아마도 돈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거나 정치적인 접근을 할려면 빚이 늘어가거나 하는 문제는 아테네의 정치사회를 보면 쉽게 이해되는 문제인듯 하다.

저녁이 있는 삶은 정치발전에 있어서도 중요한듯 하다.  

2018년 8월 11일 토요일

Inner slaughter / 경로의존성


얼마전 진보진영의 정치인이 자살하자 보수진영의 정치인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훈계조의 비평을 해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해당 보수진영의 정치인이 인간적 기본윤리의 측면이나 동종업계의 공감을 모두 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은 점에 있어서는 사회감정들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서는 이념, 권력, 정치의 세계가 야망과 탐욕의 감정과 결부되어 극단적으로 몰입해가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사를 생각하면 보수진영 정치인의 비평은 정적(政敵)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전통과 습관의 연장으로서 당연한 것 같았다. 

원래 인간이 하는 일이란 중용을 찾기가 힘든 것 같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이 지켜야 할 철학적 윤리로서 '중용(中庸)'을 이야기하며 그 중용의 길을 가기 위해서 많은 의지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스승인 플라톤(Platon)의 주지주의(主知主義)철학에 대비하여 주의주의(主意主義)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치분야나 경제분야 할 것 없이 인간사의 모든 분야는 경로의존성이 있는듯 하다. 끊임없이 정신에너지를 투입해주지 않으면 습관과 전통의 노예가 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인 것을 이해하면 놀랄일은 아닌듯 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빠져 나오지 못함은 문제가 된다. 특히 이념에 관해서는 완전히 몰입하여 각자가 다른 세상으로 끌려들어가는 모습을 북한의 실상에서 보고 있고, 한국도 위기를 많이 경험하는듯 하다. 보수정치인의 각박한 비평이 비난을 받는 점은 이와 같이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념과 정치적 야망에 몰입하여 중심을 잃어버렸다.' 그런 현상이 심해지면 각자는 동족이나 동료들의 피까지 봐야하는 내부도살자(Inner slaughter)의 형태로 발전하게 될듯 하다.

Chiang had brought in the Germans when the Russians pulled out after he turned on his Communist allies in 1927 in Shanghai, Chiang's butchers chopped off so many Communist heads their weary arms could hardly raise the great scimitars frome their sides.

The Russian advisers had come in the days of Dr. Sun Yat-sen, the founder of the Chinese republic, whose mantle Chiang was trying to drape over his own narrow shoulders, General Galen and the others had won Chiang's respect at Whampoa Military Academy in Canton when he was commandant. Nonetheless, in 1927 he would have killed them all, and Mikhail Borodln, Stalin's special agent in China, as well, had he been able to lay hands on them. Chiang was ready to slaughter every Communist in China in his drive to win power for himself.

But that was another story . Chiang had some professional respect for the Communist commanders fighting him in Jiangxi. He knew many of them from the days when they had all marched together under their banner of Dr. Sun. one of the leading "bandits," Zhou Enlai, had been Ching's number two, the political chief , at Whampoa. Many others had passed through the Academy. Not Mao Zedong. Chiang hadn't encountered Mao but he knew a lot about him and, of course, he knew that other leading "Red," tough old (forty-eight) Zhu De. Zhu De had been a warlord general and an opium smoker before he joined the Communists.  

- Harrison E. Salisbury의 [THE LONG MARCH] -